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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백정기 (1896~1934) 의사 |
호 |
구파(鷗波) |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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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전북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新雲里)(前東津面 下長) |
주요활동 |
1896년 1월 19일 (字 士順)과 파평윤옥문(坡坪尹玉文)의 장남으로 음력 1월 19일 출생하다.
1906년(11세) 부안군 南下面 內辰里로 이거하다.
1908년(13세) 정읍군 永元面 鶯城里 조병열매(曺秉烈妹) 조팔락(曺八洛)과 결혼하다.
1911년(16세) 부친별세하고 정읍군 영원면 隱仙里 曷山마을로 이거하다.
1919년(24세) 1) 2월에 강토를 강점당하고 왜정하에서 신음하는 설음을 설진하고저 무력투쟁을 통하여 결사구국할 것을 결심하다. 이때 전국에서는 민족봉기의 기운이 성숙하자 상경하여 3.1운동에 참가하였다. 2)8월에 동지규합과 자금모집에 동분서주하는 중 본계획이 누설되어 일시 奉天으로 피신하다.
1920년(25세) 서울로 잠입하여 재기를 꾀하던차에 당시 本町 경찰서(中部署)에 피검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무사방면되다.
1922년(27세) 왜정의 탄압으로 부득이 奉天을 떠나 北京으로 망명하여 이회영,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 전선에서 고군분투하였다.
1923년(28세) 일본에 밀입국하여 東京부근 하야가와(早川)수력공사장에 은신하며 日王 암살을 기도하던중 동경 대지진으로 결국 북경으로 돌아가다.
1924년(29세) 1) 북경에서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유자명, 정화암 등과 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고 동지들과 주간지 “正義公報”를 발간하였다. 2) 11월에 上海로 가서 영국인 철공장에서 일하면서 폭탄 제조기술을 익히며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 지도하였다.
1925년(30세) 상해에서 5월 30일 총파업이 단행되자 중국인 아나키스트(화남연맹)들과 수만의 노동자를 동원 총파업을 지휘하였다.
1927년(32세) 이을규, 이정규와 푸젠성 취안저우(복건성 천주시)에 민남25현 민단편련처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농촌의 自治自衛운동을 韓,中,日 삼국동지 합작으로 일으키다.
1928년(33세) 5월 남경에서 朝,日,中,比,印,安南 등 제국대표로 조직된 東方無政府主義者 연맹에 조선대표로 참가하고 동연맹기관지 “東方”편집위원이 되었다.
1930년(35세) 10월말 북만주 吉林省 해림으로 가서 그곳 在滿同志 김종진, 김야운 등과 같이 김좌진, 이을규 등 동지들이 조직한 韓族總聯合會에 가담하여 在滿同胞의 조직강화와 혁명사상 고취에 전력하다.
1931년(36세) 1) 5월 病 치료차 상해로 돌아와 몸을 요양하는 한편 영국인 戰車會社의 매표원으로 일하며 독립운동에 집중하고 있는 동지들을 부양하다. 2) 9월 만주사변 촉발을 계기로 이회영, 유자명 등과 협의하여 남화 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산하 단체로서 남화구락부를 두어 기관지“남화통신”을 발간하다. 3) 10월말 중국인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韓日救國聯盟을 결성하고 산하 행동대인 흑색공포단(B.T.P)을 편성하다.
1932년(37세) 12월 일본육군과 군수물자를 싣고 天津港에 입항한 11,000톤급 日淸船에 폭탄을 던져 선체일부를 파괴하고 이여산과 함께 천진 일본 총영사관 관저에도 폭탄을 던지다.
1933년(38세) 이강훈, 원심창, 정화암, 오세민과 함께 왜적이 중국 군관을 매수하고자 駐中 日公使 有吉明과 왜군요인 중국정부친일거두들이 상해 武昌路 六三亭에서의 밀회를 탐지하고 同會議場을 격파하여 일망타진하려는 순간 영사관 경찰의 습격을 받고 포로가 되어 日本長崎 법원에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형을 선고파고 복역하게 되다.
1934년 6월 5일(39세) 甲戌年 陰4월24일 陽6월5일 오후 11시 옥중에서 39세를 一期로 逝去하였다.
1963년 3월 1일 정부에서 大韓民國 建國功勞勳章 獨立章을 추서하였다.
1997년 4월 의열사 기공
2004년 6월 5일 구파 백정기의사 순국 60주기 추모행사겸 의열사 준공 및 영정봉안제를 올렸음 |
가족 |
부친: 백남일(白南一), |
주변인물 |
이강춘, 원심창, 이회영,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신채호 |
어록 |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 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스럽고 한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송이를 무덤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 일본 나가사끼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육삼정의거를 도모했던 이강춘 의사, 원심창 의사에게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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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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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
전북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734 (전라북도 정읍시 문화관광과 063-530-7790) |
묘소 |
國民葬으로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효창원 묘역에 안치 |
기념비 |
전북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609-1 (영원면 사무소) |
관련단체 |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
참고, 출처 |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회, 네이버(독립영웅카페),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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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철 (金鐵, ?~1925) |
호 |
일강(一江) |
본관 |
영산 |
출생지 |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9번지 |
주요활동 |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구국활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1911년 남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3·1운동 후 한족회(韓族會) 간부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하였다.
1924년 대한통의부를 비롯하여 서로군정서·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광정단(匡正團)·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의성단(義成團)·고본계(固本契) 등 8개 단체가 통합하여 조직된 정의부에서 이장녕(李章寧)·조욱(曺煜)과 함께 군사 분과 위원을 맡아 활동하다가 하이룽현[海龍縣]에서 일본경찰에게 살해되었다. |
가족 |
부친 김동진, |
주변인물 |
여운형, 장덕수, 이시영, 조완구, 송병조, 양기탁 |
생가 |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546-2 |
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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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불갑사입구 |
어록 |
"나는 조국 독립을 위해 기꺼이 이 한몸 조국에 받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 -후에 부인께서도 단심송에 목을 메어 순국하셨다. |
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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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출처 |
네이버백과, 교통부총장대리( 交通部總長代理) 김철(金澈)의 1920년 신년감상(독립신문 대한민국2년(1920)1월 10일 2면) |
<원문자료>
1. 일생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9번지에서 부친 김동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4남 1녀중 3남으로 출생하여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그는 신학문을 배워야 극일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1908년 영광에 있는 광흥중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하고,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고향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형제들과 상의해 노속들에게 토지 일부를 떼어주고 집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었다.
1917년 2월 나라를 잃은 설음에 분노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중국상해로 망명하였다. 1918.8.20. 중국상해 프랑스조계 백미로 25호에서 여운형,장덕수,김철,조동호,선우혁,한진교등 6명이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다. 신한청년당 부주무로서 기관지「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하였다.
1918년 11월 중국상해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을 초청하여 만찬회를 열어 만찬회석상에서 여운형, 김철, 장덕수, 신국권등이 만나서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의견을 교환하고 윌슨에게 보내는 대한의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 여운형,김철,김규식 등이 협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대한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각국에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서병호, 선우혁과 같이 국내에 밀입국하여 자신의 전답을 정리하여 독립자금 1만원을 마련하여 상해로 가져가 독립운동 동지들의 생활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동년 2월 서울에서 손병희 선생을 만나 3만원의 독립자금 지원을 언약 받고, 3.1만세운동 거사를 계획하고 상해로 건너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신익희(申益熙), 신석우(申錫雨), 조동호(趙東祜), 신규식(申圭植),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시 보창로 불란서 조계내에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19년 4월 10일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의원(전라도 대표)에 선임되었고,같은 달 제2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임시정부 재무위원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같은해 8월에 임시정부 교통부차장에 임명되었는데, 총장 문창범이 취임하지 않아 총장직까지 겸하게 되었다.1920년 1월에 그는 김구 등과 같이 의용단(義勇團)을 발기해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의용단 산하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장 안창호를 도와 선전업무에 종사하였다.
그러던중 임시의정원과는 별도로 안창호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그결과 양자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급기야 1922년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가 만들어 지고 김철은 시사책진회 회원으로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간의 갈등 조정에 들어가 갈등을 해결에 기여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규정을 만들어 공포한다. 이런 활약이 높이 평가되어 그는 192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12월 김구(국무령)내각 국무위원에 임명되었고, 1927년 8월 이동녕 내각 군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7월 조직된 한국독립당의 14인 이사 중의 한명으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12월 새 헌법에 의하여 임기가 만료 제2차 내각구성에서 군무부장에 재임명되었고,1931년 10월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심판이 되어 상해교민의 복지향상에 전념하였다. 같은해 11월 중국인과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소앙과 중국인 오징천,서천방 등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1932년 1월 상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정치위원으로 선출되고,같은 해 11월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사의 일황 저격사건과 동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중국 홍구공원에서의 백천대장 등 일본인 폭살 양대 의거를 당시 군무장으로서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이 주도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일경의 추격이 급박해지자 상해에 있는그의 친지인 미국인 피치목사의 집 2층에 백범,엄항섭,안공근과 같이 피신해 있었다.
같은해 5월 10일 상해임시정부를 항주로 이동하여 선생의 숙소인 항주시 소재 청태(淸泰)제2여사(第二旅社)32호실에 임시정부판공처(臨時政府判公處)를 설치하여 임시정부 항주시대를 개막하였다. 동년 5월 16일 항주에서 첫 국무회의에서 선생은 재무장 에 김구선생은 군무장에 임명되었다.
1933년 7월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임되어 자격심사위원으로 신도의원의 자격을 심사하였다. 같은해 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과 함께 결성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34년 1월 3일 제3차내각(주석 양기탁) 무임소장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4월 2일 국무원비서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이동에 따라 각지를 전전하면서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며 몸받쳐서 기력이 다 할때까지 분골쇄신하였다. 한때 김구와 맞선 조소앙(趙素昻)과 제휴하였다.
2. 일생 마침
1934년 6월 29일 중국 항주(杭州)소재 광자병원에서 격무에 시달려 몸이 쇠진하여 급성폐염으로 순국하였다. 이시영, 조완구, 송병조, 양기탁 등 임정요인들의 애도속에 악비묘(岳飛廟) 뒷산에 안장되었다. 사실 일강은 상해에 망명하기 전에 고향에서 김해김씨 부인과 혼례를 치루고 부인은 고향에 남아 있었다.
상해에서 일강으로부터 "나는 조국 독립을 위해 기꺼이 이 한몸 조국에 받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라는 서신을 받고 "부군이신 선생께서 가족 걱정없이 오로지 독립운동에 전념토록 하기위해 죽는길 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이곳 집뒤에 있는 단심송(斷心松)에 목을 메어 순절하고 말았다.
그후 상해에서 조산원이던 최혜순(崔惠淳)여사와 혼인하여 미경, 혜경 등 두딸을 남겨 두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3. 주요 연설문
◆ 신념의 감상『新年의 感想』
「교통부총장대리(交通部總長代理) 김철씨 담(金 澈氏 談)」
작년(昨年)을 돌아보면 참 감개무량(感槪無量)하오 나도 비재(菲才)로 최초(最初)부터 제형배(諸兄輩) 동지(同志)로 더불어 독립운동(獨立運動)의 획책(劃策)의 말석(末蓆)에 참여(參與)하는 영광(榮光)을 득(得)하였거니와 과거(過去) 우리 동포(同胞)의 충성(忠誠)되고 용감(勇敢)한 활동(活動)은 더 감사(感謝)할 말이 없습니다.
다행(多幸)히 우리 동포(同胞)의 애국심(愛國心)과 단결력(團結力)은 더욱 작열(灼烈)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기초와 각원(各員)의 화합(和合)도 더욱 공고하며 대정(大政)의 방침(方針)도 연말(年末)까지에 확립(確立)하였으니 今年부터는 前年에 배사(倍徙(艸)한 대활동(大活動)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정부(政府)만으로 어찌 하겠습니까 내외(內外)의 각단체(各團體)와 국민(國民)이 일심일체(一心一體)가 되어 일일(一日)이라도 바라는 대사업(大事業)을 성취(成就)하기에 육력(戮力)하기를 바랍니다.
▶「교통부총장대리( 交通部總長代理) 김철(金澈)의 1920년 신년감상(독립신문 대한민국2년(1920)1월 10일 2면)」
4. 주요 유적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546-2「일강 김철선생 기념관」(2003.6.28)과 생가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불갑사입구「임시정부 국무위원 일강 김철선생기념비」(1984.6.28)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지경재「일강 김철선생 숭모비」(1975.8.15)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산47 「유조선국 영산김씨세장비」(1919.10.)(전남문화재 제142호) 대한민국임시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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