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음력 5월 5일인 단오절에 여러 가지 민속행사를 가졌었다. 이러한 민족문화가 일본제국주의의 문화 말살정책과 한말개화기 이후 들이닥친 신파연극이나 영화 등의 공연예술의 추세에 밀려 현재는 거의 사라지고, 그 명맥을 정통으로 잇고 있는 곳은 서해안의 법성포와 동해안의 강릉밖에 없다.
법성포 단오제와 강릉 단오제는 민족문화를 계승해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하고 특히 법성포 단오제는 제반 여건이 강릉에 비해 열악한데도 지금까지 이어온 점에 깊은 의의가 있다.
우선 법성포는 행정단위가 면(面)이고 강릉은 시(市)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구 ?면적 ?산업의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한 차이는 행사를 치루는 과정에서 인적 ?물적자원의 어려움이 되고, 이 어려움을 극복한 까닭에 법성포 단오제에 높은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또 법성포는 행사비용을 면민들의 자발적인 갹출(醵出)에 의하고 강릉은 행정관청에 의지한다는 점과 모든 행사를 법성포는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치룬다는 점이다. 이는 법성포 지역 공동체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단면으로, 공동체가 물질문명에 밀려 거의 파괴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法聖浦 端午祭의 歷史的考察
고서 대동지지에서는 이 고장의 풍속을 속신귀라 하였고 혹은 사상민예민무농상이라 하였다. 또 찰리사안초는 그의 시에서 이고장을 미속태사전이라 예찬하였다. 그러나 정작 법성포 의 단오제가 어느 시기부터 제전적 격식을 갖추고 정착되었는지에 관하여는 문헌자료가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술회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간접적인 사료를 토대로 여건을 종합하고 배경을 분석하면 긍정적인 답은 나온다.
이 고장 법성포는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중국과의 거래가 있었을 만큼 수로가 발달되었던 곳이다. 때문에 백제 침류왕 원년에는 불교가 동진에서 승 마라난타에 의해 도래되었고, 고려조에는 국가 중추기관인 조창이 건치되었다. 그러나 이 고장에서 단오가 대중적 행사로 되어진 것은 적어도 임병양란을 치루과난 인조 15년(1637)이후 였을 것이다. 이 고장에 수군의 기지인 법성진이 설치된 것은 중종9년(1514)이며 역시 숲쟁이에 진성의 연장으로써 조림을 한 것도 그때였지만 최소한 130년이 지나고서야 구 수목에서 추천(그네)이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건은 법성의 파시와 연결짓는 일이다. 때의 고금은 막론하고 대규모 행사에는 수반이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다. 더불어 단오절은 시기적으로 법성의 조기파시와 일치한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이 고장은 유독 토속신앙이 민감하던 고장이다. 이유는 지리와 경제면에서 찾아야 한다.
본시 이 고장은 삶의 터전을 삼고 활동하는 곳이 모두 바다이다. 조운선이 그러하고 수군도 그러하며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등에 칠성판을 지고 다닌다 하지 않는가? 우선 해상의 일상만사가 무사하고 재수대통의 소원 때문에 산에는 여제단을 설치하여 성황리에 고사를 올렸고 바다에는 용왕제와 풍어제를 올렸다. 그와 같은 일편의 희망과 여건이 상호부합되어 법성포의 단오제는 일취월장 그 제전의 규모가 방만해지고 행사의 내용 또한 다채로워졌다. 여기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이 보부상들의 역할이다.
임병양란 이후 그들은 전국적으로 조직을 정비했기 때문에 상고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재력외에 신속한 정보와 홍보의 체계도 갖추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유교의 전통적 윤리관 때문에 사회적으로 는 매우 경시되었으나 하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양심과 가난한 자를 도와줄 줄 아는 의리의 조직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그들은 법성의 유수한 물산객주등과 백목전계라는 협동조직을 결성하여 그들이 행사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전야에는 앞바다에 유람선을 띄우고 삼현육각을 잡혔으며 당일에는 먼저 인의산에 있는 여제단의 서낭신에게 고사를 했다. 본 행사는 숲쟁이 녹음방초 위에서 순차대로 진행이 되는데 씨름과 추천을 시작으로 각종 예능들의 경연방식을 취했다. 가인금객은 팔도에서 모여 들었고 장원을 하므로서 명인명창으로 인정을 받았다. 예로부터 동해안에는 강릉 단오제 서해안에서는 법성포 단오제가 있어서 가히 쌍벽의 세를 과시 하여왔던 깊은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1989년 부터는 부대행사로써 영광굴비 홍보도우미 선발대회도 병행하고 있는데 이는 특산물의 홍보 및 판촉을 위함이다.
부용창(芙蓉倉-法聖倉)천년의 역사
지금으로부터 천여년전인 992년은, 한반도를 고려가 통치하였고 조정은 성종이라는 어진 제왕이 있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구가하였다. 이 고을은 역시 영광이라 하였는데 그때 법성에는 부용창(芙蓉倉)이라는 국가 재정의 중추기관이 건치(建値)되었다.
이때 조정은 한강 이남에 12개소의 조창을 두었는데, 곡창지대인 전라지방에는 반이나 되는 6개소의 조창을 두니 부용창은 그중의 하나이다. 당시의 법성은 진개부곡(陣介部曲)이라 하여 지금의 용성리에 있었고 조창도 대덕산 뒷자락 지금의 고법성(古法聖)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국내적으로 노쇄현상이 나타나자 왜구(倭寇)의 약탈이 극심해졌다. 그들의 해적행위는 해상에서 그치지 않고 조창에까지 도전해오니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하고 중단하고 말았다.
새로운 조선은 건국 초부터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잠재우고 조운(漕運)을 재개하였다. 이때 조창은 대폭 개편되었으니 전국에 9개, 전라에 3개로 축소되었다. 때문에 각 조창마다 수세지역(收稅地域)은 증대되었다. 종전의 관할지역에 관해서는 문헌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복창(復倉)되면서는 영광을 위시하여 옥과, 담양, 장성,정읍, 곡성, 순창, 고창, 창평, 흥덕, 부안, 함평, 진안, 무장, 고부등15개 군현(郡縣)을 맡았다. 이때에 조창의 소재지도 법성포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120년이 지난 중종 7년에는 법성창에 대대적인 변혁이 온 것이다. 이웃 나주에 있던 영산창이 제반사정 때문에 폐창(廢倉)되면서 법성창에 병합된 것이다.
이로써 법성창은 무려 28개 지역을 관할하는 국내 최대의 거창(巨倉)으로 일약 발돋음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구사기지(軍事基地)를 설치하였는데, 최초에는 만호진(萬戶鎭)이라는 소규모의 수군(水軍)을 주둔시키는데 그쳤다. 점차 그 규모가 커져 116년 후인 인조8년(1630년)에는 첨사진(僉使鎭)으로 하였다가 정조13년(1789년)에는 독진(獨鎭)으로 승격되었다.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는 품계(品階)로는 종3품에 지나지 않지만, 독진(獨鎭)이 된 후로는 진량면(陳良面)의 행정일반까지를 영광군수의 관할 밖에서 집행하게 되었으니, 거창(巨倉)으로서의 면모를 가추고 위세가 당당하였다.
이상과 같이 수백년 동안 존재해온 법성포의 조창도 시대적 변천과 국가적 비운(悲運)으로 인하여 서서히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져 갔는데, 정확히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불분명하나, 일본이 우리나라에 침략의 전초전을 펴던 1800년대 말까지도 명맥이 유지되었던 것 같다.
이상에서 주마간산(走馬看山)이나마 우리 고장의 조창사(漕倉史)를 회고하였는데, 역시 우리 법성포의 역사는 그 근원을 조창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조창(漕倉)이 있었기에 수군(水軍)이 있었고, 조창과 수군은 우리 국가에 재정(財政)과 군사적(軍事的)으로 크게 공헌하지 않았는가.
다시 말해 우리고장 법성은 삼국시대에는 종교적으로, 고려시대에는 경제적으로 조선시대에는 군사적으로,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여하튼 우리는 그러한 맥락에서 법성창(法聖倉)천년의 역사를 긍지와 자부로 이어지기를 바랄뿐이다.
법성포 단오제와 강릉 단오제는 민족문화를 계승해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하고 특히 법성포 단오제는 제반 여건이 강릉에 비해 열악한데도 지금까지 이어온 점에 깊은 의의가 있다.
우선 법성포는 행정단위가 면(面)이고 강릉은 시(市)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구 ?면적 ?산업의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한 차이는 행사를 치루는 과정에서 인적 ?물적자원의 어려움이 되고, 이 어려움을 극복한 까닭에 법성포 단오제에 높은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또 법성포는 행사비용을 면민들의 자발적인 갹출(醵出)에 의하고 강릉은 행정관청에 의지한다는 점과 모든 행사를 법성포는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치룬다는 점이다. 이는 법성포 지역 공동체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단면으로, 공동체가 물질문명에 밀려 거의 파괴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法聖浦 端午祭의 歷史的考察
고서 대동지지에서는 이 고장의 풍속을 속신귀라 하였고 혹은 사상민예민무농상이라 하였다. 또 찰리사안초는 그의 시에서 이고장을 미속태사전이라 예찬하였다. 그러나 정작 법성포 의 단오제가 어느 시기부터 제전적 격식을 갖추고 정착되었는지에 관하여는 문헌자료가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술회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간접적인 사료를 토대로 여건을 종합하고 배경을 분석하면 긍정적인 답은 나온다.
이 고장 법성포는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중국과의 거래가 있었을 만큼 수로가 발달되었던 곳이다. 때문에 백제 침류왕 원년에는 불교가 동진에서 승 마라난타에 의해 도래되었고, 고려조에는 국가 중추기관인 조창이 건치되었다. 그러나 이 고장에서 단오가 대중적 행사로 되어진 것은 적어도 임병양란을 치루과난 인조 15년(1637)이후 였을 것이다. 이 고장에 수군의 기지인 법성진이 설치된 것은 중종9년(1514)이며 역시 숲쟁이에 진성의 연장으로써 조림을 한 것도 그때였지만 최소한 130년이 지나고서야 구 수목에서 추천(그네)이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건은 법성의 파시와 연결짓는 일이다. 때의 고금은 막론하고 대규모 행사에는 수반이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다. 더불어 단오절은 시기적으로 법성의 조기파시와 일치한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이 고장은 유독 토속신앙이 민감하던 고장이다. 이유는 지리와 경제면에서 찾아야 한다.
본시 이 고장은 삶의 터전을 삼고 활동하는 곳이 모두 바다이다. 조운선이 그러하고 수군도 그러하며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등에 칠성판을 지고 다닌다 하지 않는가? 우선 해상의 일상만사가 무사하고 재수대통의 소원 때문에 산에는 여제단을 설치하여 성황리에 고사를 올렸고 바다에는 용왕제와 풍어제를 올렸다. 그와 같은 일편의 희망과 여건이 상호부합되어 법성포의 단오제는 일취월장 그 제전의 규모가 방만해지고 행사의 내용 또한 다채로워졌다. 여기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이 보부상들의 역할이다.
임병양란 이후 그들은 전국적으로 조직을 정비했기 때문에 상고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재력외에 신속한 정보와 홍보의 체계도 갖추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유교의 전통적 윤리관 때문에 사회적으로 는 매우 경시되었으나 하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양심과 가난한 자를 도와줄 줄 아는 의리의 조직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그들은 법성의 유수한 물산객주등과 백목전계라는 협동조직을 결성하여 그들이 행사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전야에는 앞바다에 유람선을 띄우고 삼현육각을 잡혔으며 당일에는 먼저 인의산에 있는 여제단의 서낭신에게 고사를 했다. 본 행사는 숲쟁이 녹음방초 위에서 순차대로 진행이 되는데 씨름과 추천을 시작으로 각종 예능들의 경연방식을 취했다. 가인금객은 팔도에서 모여 들었고 장원을 하므로서 명인명창으로 인정을 받았다. 예로부터 동해안에는 강릉 단오제 서해안에서는 법성포 단오제가 있어서 가히 쌍벽의 세를 과시 하여왔던 깊은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1989년 부터는 부대행사로써 영광굴비 홍보도우미 선발대회도 병행하고 있는데 이는 특산물의 홍보 및 판촉을 위함이다.
부용창(芙蓉倉-法聖倉)천년의 역사
지금으로부터 천여년전인 992년은, 한반도를 고려가 통치하였고 조정은 성종이라는 어진 제왕이 있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구가하였다. 이 고을은 역시 영광이라 하였는데 그때 법성에는 부용창(芙蓉倉)이라는 국가 재정의 중추기관이 건치(建値)되었다.
이때 조정은 한강 이남에 12개소의 조창을 두었는데, 곡창지대인 전라지방에는 반이나 되는 6개소의 조창을 두니 부용창은 그중의 하나이다. 당시의 법성은 진개부곡(陣介部曲)이라 하여 지금의 용성리에 있었고 조창도 대덕산 뒷자락 지금의 고법성(古法聖)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국내적으로 노쇄현상이 나타나자 왜구(倭寇)의 약탈이 극심해졌다. 그들의 해적행위는 해상에서 그치지 않고 조창에까지 도전해오니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하고 중단하고 말았다.
새로운 조선은 건국 초부터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잠재우고 조운(漕運)을 재개하였다. 이때 조창은 대폭 개편되었으니 전국에 9개, 전라에 3개로 축소되었다. 때문에 각 조창마다 수세지역(收稅地域)은 증대되었다. 종전의 관할지역에 관해서는 문헌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복창(復倉)되면서는 영광을 위시하여 옥과, 담양, 장성,정읍, 곡성, 순창, 고창, 창평, 흥덕, 부안, 함평, 진안, 무장, 고부등15개 군현(郡縣)을 맡았다. 이때에 조창의 소재지도 법성포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120년이 지난 중종 7년에는 법성창에 대대적인 변혁이 온 것이다. 이웃 나주에 있던 영산창이 제반사정 때문에 폐창(廢倉)되면서 법성창에 병합된 것이다.
이로써 법성창은 무려 28개 지역을 관할하는 국내 최대의 거창(巨倉)으로 일약 발돋음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구사기지(軍事基地)를 설치하였는데, 최초에는 만호진(萬戶鎭)이라는 소규모의 수군(水軍)을 주둔시키는데 그쳤다. 점차 그 규모가 커져 116년 후인 인조8년(1630년)에는 첨사진(僉使鎭)으로 하였다가 정조13년(1789년)에는 독진(獨鎭)으로 승격되었다.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는 품계(品階)로는 종3품에 지나지 않지만, 독진(獨鎭)이 된 후로는 진량면(陳良面)의 행정일반까지를 영광군수의 관할 밖에서 집행하게 되었으니, 거창(巨倉)으로서의 면모를 가추고 위세가 당당하였다.
이상과 같이 수백년 동안 존재해온 법성포의 조창도 시대적 변천과 국가적 비운(悲運)으로 인하여 서서히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져 갔는데, 정확히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불분명하나, 일본이 우리나라에 침략의 전초전을 펴던 1800년대 말까지도 명맥이 유지되었던 것 같다.
이상에서 주마간산(走馬看山)이나마 우리 고장의 조창사(漕倉史)를 회고하였는데, 역시 우리 법성포의 역사는 그 근원을 조창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조창(漕倉)이 있었기에 수군(水軍)이 있었고, 조창과 수군은 우리 국가에 재정(財政)과 군사적(軍事的)으로 크게 공헌하지 않았는가.
다시 말해 우리고장 법성은 삼국시대에는 종교적으로, 고려시대에는 경제적으로 조선시대에는 군사적으로,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여하튼 우리는 그러한 맥락에서 법성창(法聖倉)천년의 역사를 긍지와 자부로 이어지기를 바랄뿐이다.
출처 : 영광군문화관광해설가
글쓴이 : 로즈마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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