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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君의 기본 요건!!!

항샘 2012. 3. 18. 10:53

[Weekly BIZ] [동양학 산책] 조조·당태종·강희제… 名君의 기본 요건은 戰場에서도 책과 함께

조선비즈 | 신동준 박사· | 입력 2012.03.17 03:06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을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고 한다. 명군(名君)의 기본 요건이다. 중국의 역대 제왕 가운데 이를 실천한 대표 인물은 조조와 당태종, 강희제 등 3인이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조조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병서였다. 생전에 주석서인 '손자약해(孫子略解)'를 비롯해 '병서접요'와 '속손자병법'등 여러 권의 저서를 펴냈다. '손자약해'가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손자병법이다.

↑ 신동준 박사·21세기정경연구소장

그의 리더십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기존의 가치와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적인 발상, 능력위주의 인재등용과 적재적소 활용, 파격적인 포상과 일벌백계의 신상필벌, 때가 왔을 때 우물쭈물하지 않는 과감한 결단이다. 삼국시대는 실이 마구 뒤엉킨 것과 같은 난세였다. 근원적인 해결은 단칼에 실타래를 베어버리는 쾌도난마밖에 없었다. 난마는 군웅할거를 뜻한다. 백성들에게는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랫동안 '난세의 간웅'으로 매도됐다. 중국의 초대 사회과학원장을 지낸 곽말약은 말했다.

"후한의 조정은 외척과 환관들의 온갖 비행으로 인해 부도덕한 지배층의 소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자들을 몰아낸 게 어찌 찬역인가? 조조는 부패하고 무능한 한나라를 대신해 위나라를 세우고, 경제를 부흥시켰고, 한나라를 재건하겠다는 백일몽에 빠진 유비 등의 야심가들과 싸웠다. 그는 탁월한 정치가였고, 우수한 전략가였고, 백성들의 아픔을 아는 진정한 황제였다."

그는 험한 산과 깊은 물을 건널 때 시흥이 일면 곧바로 시를 지었다. 건안문학(建安文學)을 창도한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은 당나라의 실질적인 창업주였다. 군웅 토벌에 나서면서 서예이론서를 써낼 정도로 문예에 조예가 깊었다. 그가 명장 이정(李靖)과 함께 역대 병서의 특징을 논한 '당리문대(唐李問對)'는 북송(北宋) 때 '손자병법'과 더불어 무경7서의 하나가 됐고, 명신 위징(魏徵)과 치국평천하를 논한 정관정요는 역대 제왕의 필독서였다. 조조처럼 검박한 생활을 영위한 그는 동궁을 다시 축조해야 한다는 건의가 올라오자 이렇게 답했다.

"짐이 기거하는 궁전은 건축한 지 40여 년이 경과했지만 손상된 곳이나 파괴된 곳이 많지 않다. 다만 태자의 궁전은 목수들이 몹시 새롭고 기이하게 지으려 한 나머지 건축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훼손된 곳이 많다. 지금 다시 고치고자 해도 예전 궁전과 닮게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중국 최대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을 펴낸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는 서양 과학기술에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신강 일대를 평정할 때 군막 안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삼각함수를 푼 게 그렇다. 그의 일상생활은 서민과 거의 같았다. 명나라는 황궁의 침상과 바닥깔개 등에 매년 3만냥을 지출했으나 그의 치세 때는 전무했다. 그는 "모든 비용은 백성의 고혈로 이뤄지는 것이다. 황제로서 절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내궁인 건청궁의 궁녀도 100여명 남짓해 역대 황제 중 가장 적었다. 그의 손자 건륭제(乾隆帝)는 수불석권을 행했으나 검소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100여 년 동안 이어진 소위 강건성세(康乾盛世)의 정점에서 세계 GDP의 3할을 차지한 덕분이다.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인재의 등용과 활용이었다. 용인의 이치를 논한 정관정요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동서고금의 모든 책을 망라한 '사고전서(四庫全書)'도 이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