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하면 우리는 곧잘 鎖國政策(쇄국정책)을 떠올리게 된다.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일찍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대원군. 그래서 결국 亡國(망국)의 길을 걷게 한 장본인.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흥선대원 군 李昰應(이하응)의 보편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나 역사는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흥선 대원군=쇄국정책'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그를 다시 한번 照 明(조명)해 보고 싶은 강한 욕망에서 이 글을 써 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대원군은 며느리인 明成皇后와 권력 다 툼이나 하다 죽어간 그런 탐욕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정치인 가운데 누구보다도 조선과 조선 민족을 사 랑했다. 그것은 그가 破落戶(파락호) 시절에 천민들과 어울리며 민중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한 마 디로 그가 바로 國王이 되었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 이다. 그 누구도 생각을 못했던, 양반에게도 세금을 물린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과단성 있는 인물이며 민중을 위한 정치인 인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취한 소위 쇄국정책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史觀 (사관)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볼 수 있다. 나쁘게 생각하면 쇄국 이요, 좋게 보면 護國(호국)이 아니겠는가. 당시 江華島(강화도)를 침범한 프랑스나 미국이 과연 우리를 도와주러 왔을까. 말이 通 商(통상)요구이지 그들은 바로 帝國主義者(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선발대인 것이다. 그리고 대원군은 무조건 쇄국을 고집하지 않았 다. 우리의 內實(내실)부터 다져 놓고 천천히 나라의 문을 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국왕 이하 썩어빠진 大臣들은 흥선대원군 의 遠大(원대)한 뜻을 알지 못했다. 壬午軍亂(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다시 권좌에 복귀하였는데 대원군을 미워하는 세력들이 그를 그냥 둘 리 만무하였다. 끝내 淸(청) 의 군대를 끌어 들여 대원군을 天津(천진)으로 납치하고야 말았다. 이때 대원군은 淸의 실력자 李鴻章(이홍장)과 국제정세에 대하여 격론 을 벌이는데 대원군의 달변과 명쾌한 논리에 이홍장은 말문이 막혀버 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납치의 주동자 馬建忠(마건충)에게 "되놈!" 이라고 호령하면서 그 기백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 北洋大臣 이홍장은 대원군이 무서운 인물이라는 것을 한 눈에 간파한 것이다. 작은 나라 조선에 저렇게 비범한 인물이 있었다니.......? 만약 대원군이 바로 조 선의 왕이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홍장은 생각할수록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乙未事變(을미사변) 때 明成皇后를 권좌에서 밀어내고자 일본 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와 같이 景福宮(경복궁)에 들어간 老醜(노추)를 보여주기는 했으나 그는 조선의 마지막 호걸이요, 영웅임에 틀림없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일본에서는 조선의 호랑이가 물러났다고 손뼉 을 치며 좋아했다고 하니 그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保身策(보신책)의 파락호 시절 이미 그는 大鵬(대붕)의 뜻을 품고 있었다. 썩어빠진 大臣들은 제 한 몸 살기에 급급했고 임금은 여인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백성의 피를 빨던 양반들을 응징하였으며 밀려드는 外勢(외세)에 과감히 도전하였다.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을 숙청하였다. 아, 그 누가 알리요 대원군의 그 높은 뜻을 중국이나 일본에 의존하지 않는 自主 조선의 雄志(웅지)를 淸(청)의 실력자 이홍장 오장경 마건충의 앞에서 조선 남아의 기백을 여지없이 보여준 조선의 호랑이 흥선대원군 그가 있었기에 조선은 다시 살아났으며 그가 있었기에 조선의 正氣는 이어졌으며 그가 있었기에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늘날까지 돌고 있다.
4335. 2. 7 竹齋(죽재) 씀
출처 : 竹齋 張鳳祚의 거닐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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