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중국 3대 작곡가, 정율성
중국 3대 작곡가, 정율성
“허균의 시 중에 ‘속마음을 매번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티없는 마음을 시린 달이 비추네(氷壺映寒月)’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7월 초 서울대 강연에서 인용한 허균(1569~1618년)의 시이다. 시는 허균이 정유재란 때, 명나라군의 일원으로 파견됐다가(1597년) 귀국길에 오른 오명제에게 전한 ‘송별시’이다. 시 주석은 허균의 시를 인용하면서 ‘티없는 마음으로(氷心玉壺),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肝膽相照)’로 양국의 우호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시 주석이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언급한 인물 가운데 ‘정율성(鄭律成·1914~1976)’이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정율성(사진)은 ‘의용군행진곡’의 녜얼(섭耳·1912~1935), ‘황허대합창’의 시싱하이(洗星海·1905~1945)와 함께 중국의 3대 작곡가로 꼽힌다. 광주(光州) 출신인 정율성은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뒤 1937년부터 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에서 맹활약했다. 혁명의 열기로 가득찬 옌안의 거리를 묘사한 ‘옌안송(延安頌)’(1938) 등 400여곡을 작곡했다.
뭐니뭐니해도 시 주석이 언급했듯 그의 ‘불멸의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가(옛 팔로군행진곡·1939)’이다. 노래는 ‘전진(向前)! 전진! 전진! 우리들의 대오 태양 따라 나간다(我們的隊伍向太陽)’로 시작된다. 일본군과 싸우는 팔로군(중국공산군)의 기백이 돋보이는 대서사시라는 평을 받고 있다. 애창되던 군가는 1988년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중국인민해방군가’로 공식 인정됐다. 정율성은 옌안 시절 훗날 중국 최초의 여성대사(주 덴마크·주 네덜란드)가 된 딩쉐쑹(丁雪松)과 결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2009년 건국 60주년 행사에서는 ‘신중국 건국에 공헌한 영웅 인물 100인’ 가운데 6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묻힌 바바오산(八寶山) 혁명 열사릉 비문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인민은 영생불멸한다. 마찬가지로 정율성의 노래도 영생불멸할 것이다.”
현대 중국사를 빛낸 한국인 위인인데, 왜 국내에서는 조명받지 못했을까. 정율성은 1945년 해방 이후 당의 명령에 따라 북한으로 가는데, 거기서 ‘조선인민군행진곡’과 ‘유격대전가’ 등 북한 군가를 다수 작곡한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불렀던 군가들이다. 중국과 북한의 대표군가를 작곡한 정율성…. 그러니 정율성이라는 이름이 남녘에서 제대로 평가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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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듣고 누구나 아는 노래를 꼽자면 바로 ‘애국가’를 꼽을 수 있다. 5천만 대한민국 국민이 아는 노래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많이 듣는 노래이기도 하다.
우리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선생을 알고 있으며, 존경 또는 사랑을 한다. 왜? 우리나라 노래를 작곡하신 분이니까? 대한민국에 '안익태'선생님이 계시다면, 이웃나라 중국에는 '정율성' 선생님이 계신다.
정율성 선생은 중국의 3대 작곡가로 불리우고 있다.
'의용군행진곡'을 작곡한 네얼과 셴싱하이와 더불어 중국 3대 음악가 중 하나로 불리고 있다.
중국의 주석이 였던 등소평이 지정한 공식 인민군 군가인 '인민해방군가'가 작곡가 정율성 선생님의 작품이다.
또한 중국 인구 중 10억 명 이상이 알고 있는 노래 중 한 곡은 정율성 선생이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이 처럼 중국에서는 유명한 작곡가 이다. 하나 놀라운 것은 정율성 선생이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율성 선생의 생가가 광주광역시 남구에 위치 하고 있다.
정율성 선생은 조국인 대한민국보다 중국에서 더욱 알려져 있다.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숭일학교 전주 신흥중학교를 거쳐 1933년 봄 셋째형 정의은, 누나 정봉과 함께 중국 남경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로 졸업하였다.
그 뒤 민족혁명당 당무를 보는 한편 남경과 상해를 가며 음악공부를 하였다. 그 후 항일운동과 함께 인민해방군 선전부에 들어가 민중노래 및 군가를 작곡 하였다. 이것이 정율성 선생이 조국인 대한민국에서 보다 더욱 중국에서 유명하고 잘알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도 정율성 선생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만큼 정율성 선생의 활동 무대는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율성선생의 조국은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음악가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또한 요즘 정율성 선생의 생가 지정 문제로 얼마간의 잡음이 있었다. 광주 양림동 생가와 백운동 두 곳 모두가 서로 생가라며 날 선 대립을 했었다. 그 후 운영위원회에서 두 곳 모두 생가로 인정을 하긴 했지만, 한 곳은 태어난 곳, 한 곳은 나서 자란 곳으로 많은 세월이 지나고 복원한 곳이라 자료의 불일치 등으로 혼선이 올 수도 있지만, 문제는 기념 사업을 관광산업화 하면서 너무나 사업적 시각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정율성 생가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은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정율성 선생의 노래 그리고 혼을 찾아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루 빨리 정상화 및 정형화 되었으면 한다.
정율성 선생의 생가 및 정율성 거리를 방문 하고자 하면 버스를 이용하면 유스퀘어에 도착해 양림동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면 된다. 또한 개인 차량을 이용하면 정율성로 검색을 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정율성 음악제 또한 정기적으로 개최 함으로 문화 행사에 참여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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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의 삶
정율성의 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