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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간다라미술에 대하여......(밑에 잇는 곳과 같은 사이트에요)

항샘 2012. 11. 15. 14:50

   간다라, 그리스인, 불교 불교미술의 발흥 불교사원과 불탑 불상과 보살상 불전부조 삼존과 설법도 부조 불교서적 맥락 양식적 연원과 편년
간다라 그 이후 간다라 미술의 재발견

간다라, 그리스인, 불교

[간다라] - 간다라(Gandhara)라는 지명은 인도의 고대 종교문런인 『리그베다』(기원전 1500-1000년)에 이미 언급되어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이름은 다시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의 대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속령(屬領)의 하나로서 등장한다. 그 이래 이곳은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서방 문헌들, 그리고 불경을 구해 인도를 방문했던 중국의 구법승(求法僧)들의 기록에 빈번하게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시대에 따라 그 지역적 범위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는데,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는 오늘날 아프카니스탄의 잘랄라바드(Jalalabad) 일대와 파키스탄의 페샤와르(Peshawar) 분지를 포괄하는 지역을 가리켰고, 중국의 구법승들의 기록에서는 대체로 페샤와르 분지에 국한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여하튼 그 중심지는 지금 파키스탄의 서북변경주(西北邊境州, Northwest Frontier Province) 의 주도(州都)인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펼쳐진 남북 약 70㎝, 동서 약 40㎞의 분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간다라는 ? 특히 문화적으로는 ? 페샤와르 분지 뿐 아니라, 그레코.로만 양식의 조각들이 출토되는 그 주변의 여러 지역들, 즉 서쪽의 카불 분지와 잘랄라바드, 북쪽의 스와트(Swat), 동남쪽 인더스강 동안(東岸)의 탁실라(Taxila)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간다라의 심장부인 페샤와르 분지는 고래(古來)로부터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여기서 서쪽으로 카이버르(Khyber) 패스를 넘으면 아프카니스탄과 이란을 거쳐 유럽의 지중해 세계에 닿고, 동남쪽으로 인더스강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면 인도의 본토에 다다른다. 이 길이 바로 알렉산더가 동진해 온 길이다. 한편으로 북쪽으로 스와트나 치트랄을 넘어 높고 험한 산길을 오르면 우리가 흔히 서역(西域)이라고 부르는 타클라마칸 사막 지대에 이르고, 여기서 동쪽으로 향하면 중국으로 길이 이어진다. 후대에는 불경과 불상이 중국으로 전해졌던 길, 또 법현(法顯)이나 현장(玄裝)과 같은 중국의 구법승들이 왕래했던 길이 바로 이 길이다.

간다라는 인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고 기원전 3세기 이래 인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인도의 일부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적 요소를 골고루 지니고 있는 그러한 여러 지역이 만나는 접점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하다. 이 같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이곳은 일찍이 기원전 1500년경 인도에 유입했던 아리아인을 필두로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인도인, 중앙아시아 출신의 샤카족, 쿠샨족, 훈족, 돌궐족 등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고, 자연스레 다양한 민족과 문화들이 혼재(混在)하면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다.

이곳 간다라에서는 기원 전후부터 수세기에 걸쳐 특이한 성격의 불교미술이 번성했다. 우리가 간다라 미술이라고 부르는 이 미술의 주제들은 대부분 인도에서 태동한 불교에 관한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주제들은 그와 전혀 이질적인 서방의 지중해 세계에서 비롯된 헬레니즘. 로마풍의 미술양식으로 표현되었다. 말하자면 동방의 종교 전통과 서방의 고전미술 전통이 기묘하게 결합된 일종의 혼혈 미술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인들] - 이 지역에 그리스에서 발원(發源)한 지중해 세계의 미술양식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물론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을 통해서이다. 알렉산더의 원정을 계기로 이 일대에는 적지 않은 그리스인들이 정착했고, 그들이 건설한 식민 도시를 통해 헬레니즘 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헬레니즘 문화 확산의 중요한 거점은 힌두쿠시 산맥의 북쪽에 위치한 박크리아(Bactria) 지방의 그리스 왕국이었다.

알렉산더의 사후 그의 대제국은 치열한 다툼을 거쳐 마케도니아와 이집트, 아시아의 새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시리아에서 아프카니스탄까지 아시아의 서반부를 포괄하는 대제국은 셀레우코스 니카토(Seleucos Nicator)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중엽 셀레우쿠스 왕조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박트리아의 그리스인 태수 디오도토스(Diodotos)는 이 기회를 틈타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박트리아의 그리스 왕국은 약 200년간 인도의 서북지방을 지배하면서, 고향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에서 그리스 문화를 상당히 순수하게 유지하였다. 디오도토스 이래의 그리스인 군주들이 남긴 화폐는 그리스 표준의 중량과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그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중언해 주고 있다.

박트리아의 그리스 왕들은 박트리아를 넘어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지원전 2세기 초 제4대 왕인 데메트리오스(Demetrios, 200-170년경) 때에는 북인도의 파탈리푸트라까지 세력을 뻗쳤다. 지금 남아 있는 화폐는 데메트리오스가 코끼리 가죽을 머리에 쓰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서 그의 인도 진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데메트리오스 때 받트리아의 그리스 왕국은 동.서 두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다. 힌두쿠시 산맥 북쪽, 즉 받트리아는 모반을 일으킨 유크라티데스(Eucratides)의 왕가(王家)가 차지하였고, 유티데모스(Euthydemos)- 데메트리오스 왕가는 그 남쪽과 동쪽을 지배하였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2세기 전반 북쪽의 초원 지대에서 남하한 유목민인 샤카족과 이란에서 흥기한 파르티아에게 박트리아를 넘겨 주었지만, 그 뒤에도 약 1세기 동안 카불 분지, 페샤와르 분지, 스와트, 펀잡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들 지역이 앞서 언급한 넓은 의미의 간다라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인도의 서북지방을 무대로 약 200년간 펼쳐진 그리스인들의 활동은 이 지역에 헬레니즘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지중해에서 발원한 미술양식을 이 지역에 이식하여 장차 간다라 미술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불교] - 간다라 미술의 또 한쪽 축을 이루는 불교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기원전 6세기 석가(釋迦, Sakya)족 출신의 성자 고타마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어,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 널리 인도에 퍼졌다. 고통으로 가득찬 삶에 대한 진단과 그러한 삶과 죽음의 연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해답은 인도의 전통적인 브라흐만교의 경직된 제식주의(祭式主義)와 계급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홍응을 얻어 급속도로 세력이 신장되었다. 특히 기원전 3세기 불교에 귀의한 아쇼카 왕의 후원을 얻게 되면서 불교는 더욱 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간다라 지방이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바로 이 아쇼카왕 때의 일이다.

야쇼카(Asoka)왕은 인도의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체 도읍을 두었던 마우리야(Maurya) 왕조의 제6대 왕이다. 이 왕조의 시조인인, 그의 할아버지 찬드라굽타 마우리야는 인도 역사상 최초로 거대한 통일 왕조를 이루었던 인물이다. 찬드라굽타 때 마우리아 제국은 인도의 서북쪽까지 세력이 팽창하여, 당시 인더스강 유역까지 뻗쳐 있던 셀레우코스 니카토와 충돌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기원전 304년 셀레우코스는 힌두쿠시 산맥을 경계로 그 이남 지역을 찬드라 굽타에게 양도하고 화의(和議)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이래 지원전 2세기 박트리아의 그리스 왕들이 남하해 올때까지 이 지역은 마우리야 왕조의 인도인들 수중에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를 이어 마우리야 왕조의 영토를 더욱 확장시킨 아쇼카는 동인도의 칼링가국을 정벌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보고 크게 뉘우쳐서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아쇼카는 불법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포교승들을 그의 영토뿐 아니라 먼 나라에까지 보내고, 또 백성들에게 불법을 믿도록 권하는 칙령을 나라 곳곳의 바위와 기둥에 새기도록 했다. 아쇼카의 포교의 손길이 간다라 지역에도 미쳤던 흔적은 아프카니스탄 남부의 칸다하르(Kandahar)와 페르샤와 분지의 샤바즈가르히(Shabhaz-Garhi)에 남아 있는 아쇼카 석각(石刻) 명문들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 이래 간다라 지역에서는 불교가 점차로 흥성했는데, 마우리야 왕조를 이어 이곳에 진출했던 그리스인들은 삶과 존재의 본질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불교에 상당히 매료되었던 듯하다. 불전(佛典)에는 메난드로스(Menandros, 혹은 Menender)라는 왕과 나가세나(Nagaseena)라는 인도의 승려가 나눈 문답을 기술한 『밀린다판하』(Milindapanha)라는 경전이 전한다. 한역(漢譯)으로는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라고 알려진 이 경전에서, 데메트리오스계의 그리스 왕으로 알려진 메난드로스는 무아(無我), 윤화(輪回), 열반(涅槃) 등 불교의 주요한 교설들에 관해 그리스인 다운 관점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결국 나가세나에게 설복되어 불교에 귀의한다. 사상적인 면에서 동서간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문답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메난드로스가 그만큼 불교에 심취해 있었고,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의 도시] - 간다라 미술의 전야(前夜), 그리스인들과 불교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중언해 주는 유물들은 아직까지 별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니 박트리아와 서북 인도에서 활동했던 그리스인들의 실체마저 오랫동안 신비의 베일에 감추어져 있었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스계 왕들의 화폐와 소수의 단편적인 유물들만이 박트리아의 존재를 실증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1964년 시작된 아프카니탄 북부의 옥서스강 유역에 위치한 아이하눔(Ai Khanum)에 대한 발굴을 통해 박트리아의 그리스인 도시는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가 세웠던 많은 알렉산드리아 가운데 하나인 ‘알렉산드리아 옥시아나’(Alexandria Oxiana)로 비정(比定)되었다. 이곳에서는 아크로폴리스를 갖춘 그리스풍의 도시계획, 코린트식 열주(列柱)를 지닌 석조 건축, 고전 양식의 신상과 인물상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한편 페새와르 분지에서는 알렉산더가 수비대를 주둔시켰던 푸쉬칼라바티(Puskalavati)가 알려져 있다. 한때 간다라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 도시는 오늘날의 차르사다(Chrsada) 근방에 거대한 규모의 성터로 남아 있는대, 이제까지 부분적인 조사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앞으로 이러한 유적들의 출현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들의 도시로서 더욱 유명한 유적은 인더스강 동안(東岸)의 탁실라에 있다. 탁실라에는 현재 비르 마운드(Bhir Mound), 시르캅(Sirkap), 시르숙(Sirsukh) 등 몇 개의 도시 유적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 시르캅은 기원전 2세기 말 박트리아의 데메트리오스가 이곳에 진출하면서 건설된 도시로 보인다. 이 도시는 총 연장 5.6㎞에 달하는 사면이 두께 5-7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으로 정문이 나 있고, 서남쪽에는 아크로폴리스가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까지 약 250년간 존속했던 이 도시에서 그리스인 시대의 흔적은 대부분 땅 속에 파묻혀 있다. 발굴을 통해 지금 밖으로 드러나 있는 건물들과 가로(街路)의 유구(遺構)는 그리스인들의 뒤를 이어 탁실라를 지배했던 샤카, 파르티아인들의 시대(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에 속하는 것이다.

[샤카, 파르티아 시대와 탁실라] - 앞서 그리스인들이 박트리아를 상실하게 된 것은 샤카족과 파르티아인들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샤카(Saka, 석가모니의 샤카Sakya족과는 다름)은 중국 사서(史書)에는 ‘새족(塞族)’이라고 알려진 종족인데, 스키타이 계통의 유목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2세기에 남하한 이들은 박트리아에서 그리스인들과 충돌하고, 그 일부는 더 남하하여 이란 동부의 시스탄으로부터 파키스탄 남부의 신드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살고 있었다. 한편 파르티아(Parthia)는 이란 북부의 카스피해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기원전 3세기 중엽 박트리아가 독립할 무렵 이곳에서도 그리스인 태수가 반란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그는 곧 출신이 명확치 않은 아르사케스(Arsacese)에 의해 축출되고, 아르사케스가 파르티아의 원주민들을 이끌고 독립에 성공하였다. 파르티아는 기원전 2세기 중엽에는 이란 전역을 차지할 정도로 강성해졌고, 급기야 박트리아에서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1세기 중엽부터 샤카족과 파르티아인들은 서북 인도에 광범하게 진출하였다. 이때부터 기원후 1세기 쿠산족이 흥기할 때까지 마우에스(Maues), 아제스(Azes) 등의 샤카족 왕들과 곤도파레스(Gondophares) 등 파르티아계 왕들이 지배하는 샤카, 파르티아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탁실라의 시르캅 도시와 이곳 출토 유물들은 바로 이 시대의 소산이다. 파르티아는 종족적으로는 이란계였지만, 그리스어를 행정어로 사용할 정도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그래서 파르티아인들과 샤카인들은 탁실라의 그리스인 도시를 차지한 뒤에도 이곳에 보급되어 있던 헬레니즘 문화를 그대로 이어갔다. 시르캅에서 출토된 금제 장신구를 비롯한 많은 유물들은 그러한 헬레니즘 영향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 시르캅에서는 통상 ‘화장용 접시’(화장명化粧皿, toilet tray), 라고 부르는 ?그러나 그 용도는 확실치 않은- 석조 원판형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러한 원판의 오목한 면에는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모티브들이 흔히 조각되어 있다. 이 ‘화장용 접시’들은 이제 바햐흐로 꽃을 피우게 될 간다라 석조미술의 전조(前兆)를 보여주는 작품들로 간주되고 있다.

시르캅을 통치한 샤카와 파르티아인들 사이에사도 불교가 신봉되고 있었다. 시르캅에서는 말굽형을 길게 늘여 놓은 것 같은 평면(혹은 애프스형 평면)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인도에서 유행하던 불교 사당의 형식이다. 그 밖에 여러 개의 불탑들이 성 안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 둘레에서는 스투코와 테라코타로 된 인물두(頭) 등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지만, 아직 불상을 비롯한 본격적인 불교 조각들은 찾아볼 수 없다.

불교미술의 발흥

[쿠샨왕조] - 간다라 미술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원 후 1세기에 흥기하여 페샤와르 분지에 도읍을 정했던 쿠샨(Kusana)왕조 시대에 들어서서이다. 쿠샨족은 원래 중국의 돈황(敦煌)과 기련(祁連)산맥 사이에 살던 월지(月氏)라는 유목민족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흉노(匈奴)나 오손(烏孫)과 같은 다른 유목민족들에게 쫓기어 중앙아시아를 떠돌다가 아프카니스탄과 간다라 지역으로 흘러 들러왔다.

그러다가 기원 후 1세기 쿠줄라 카그피세스(Kujula Kadphises)왕 때에 흥기하여 샤카족과 파르티아인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이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기원후 2세기 초 인도로 본격적으로 진출하였고, 카니슈카(Kaniska)라는 걸출한 왕의 시대(기원후 2세기 전반)에 이르러 아프카니스탄과 북인도, 서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까지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인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히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인도의 정통 브라흐만교보다는 불교에 쉽게 경도되었던 듯하다. 또 원래 유목민이었던 이들에게는 금속세공 이외에 이렇다 할 독자적인 예술 전통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나 이란 계통의 선전 미술 전통을 쉽사리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쿠샨인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불교와 불교미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카니슈카왕은 인도 역사상 아쇼카 다음 가는 호불왕(護佛王)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푸루샤푸라(Purusapura, 페샤와르)에 도읍을 정하고 그곳에 거대한 사원을 짓는 등 많은 불사와 불탑의 건립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카니슈카의 궁정에는 아쉬바고샤(Asvaghosa, 馬鳴)라는 유명한 불교시인이 머물고 있었으며, 카니슈카는 파르쉬바(Parsva, 脇尊者)라는 스승의 권고로 가슈미르에서 500명의 승려를 모아 경.율.론 삼장(三藏)을 결집했다고 알려져 있다(제4결집). 막강한 경제력의 뒷받침을 받았던 그의 시대에 불교미술 또한 황금기를 맞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불상의 탄생] - 여러 세기에 걸친 무불상(無佛像) 관행을 깨고 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것도 쿠샨 시대, 기원후 1세기 경의 일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불교미술사에서 불상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현재 남아 있는 증거로 볼 때 석가모니 시대로부터 약 500년간은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시기는 흔히 ‘무불상시대’라고 불린다. 이 기간에는 불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붓다(부처)의 생애를 미술로 도해(圖解)할 때에도 붓다의 형상 대신에 붓다를 상징하는 보리수, 빈 대좌, 법륜(法輪), 불족적(佛足跡, 부처님의 발자국) 등으로 붓다를 나타냈다. 이러한 불전 도해 방법을 ‘무불상 표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기원후 1-2세기까지 인도의 불탑에 새겨진 부조물들에서는 무불상 표현이 광범하게 쓰였음을 볼 수 있다. 간다라의 스와트에서 출토된 한 부조에서도 도리천에서 어머니께 설법을 하고 내려오는 붓다를 작은 발바국들만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불상시대가 존재했던 이유는 원래 불교가 붓다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에서 석가모니 붓다는 진리를 깨달아 가르침을 편 위대한 스승으로서 존숭(尊崇)받았지만, 신과 같이 숭배 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붓다보다는 그가 남긴 가르침, 즉 법(法)이 우선시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불상을 만들거나 숭배할 필요도 없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관행은 마치 금기처럼 굳어져 버렸다. 육신과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열반의 세계로 들어간 존재를 다시 현상계의 모습으로 재현한다는 것도 쉽사리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다가 붓다를 점차 신적인 존재로 숭앙(嵩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붓다를 인간 모습의 상으로 직접 대하고 예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불교도들 사이에 점증했지만, ‘무불상’ 관행은 쉽게 깨어지지 않았다.

[불상의 형상] - 간다라에서 창안된 불상은 커다란 천을 몸에 감싸면서 두르고 아무런 장신구도 걸치지 않은 차림이었다. 이것은 당기 간다라를 포함한 인도에서 유행하던 승려의 복장에 기초한 것으로 승려들이 입는 대의(大衣)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머리만은 삭발하는 승려들과 달리 긴 머리를 위로 올려서 상투처럼 정수리에서 묶는 형상을 하였다. 머리 뒤에는 몸에서 나오는 광채를 상징하는 원형의 두광(頭光)이 있고, 미간에는 붓다의 서른 두 가지 신체적 특징, 즉 삼십이상(三十二相) 가운데 하나인 하연 터럭, 즉 백호(白毫)가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형상으로 불상을 표현하는 방식은 이후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불상 형식으로서 널리 계승되었다.

이에 반해 마투라의 첫 불상들은 도상 형식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복장에 있어서 마투라의 상들은 승복이라고 보기 힘든, 속이 훤히 비치는 천을 걸치고 있다. 살이 많이 오른 풍성한 몸매는 마투라의 이러한 상들의 원형이 인도의 전통적인 풍요신인 약사(yaksa)의 상들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마투라에서 이 형식은 고작 한 세기 정도 쓰였을 뿐이고, 곧 간다라에서 창안된 형식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마투라의 상들이 대부분 명문에서 ‘보살’이라고 불리고 있는 점은 이러한 초기 마투라 형식이 아직 완전한 의미의 붓다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석가모니를 의미하는 보살을 나타냈던 것일 가능성을 시사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무불상 관행을 깨고 최초로 완전한 의미의 불상을 창조한 것은 간다라였다고 하여도 좋을지 모르겠다.

인도 전통에 기토한 마투라의 불상에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성격이 강했던 데 비해, 간다라의 불상은 그리스 이상인 ‘자연의 모방’에 기초한, 상대적으로 훨씬 자연주의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불입상을 예로 들면, 얼굴의 각 부분이 사실감 넘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고매해 보이는 인상 역시 서방인들이 애호했던 이상적인 형태에 가깝다. 로마인들이 입던 토가(toga)를 연상케 하는 의복의 주름은 반복적인 융기선으로 처리되었는데 입체감을 한껏 강조하였음을 볼 수 있다. 자세는 엄격한 정면관이 원칙이었지만, 한쪽 무릎을 조금 굽히고 있어서 서방 인물상의 콘트라포스트 자세를 조각가가 의식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서양 학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간다라의 불상은 그리스의 아폴로상과 같은 신상을 불교식으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한편 불좌상은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자세인 가부좌(跏趺坐)를 취하였다. 수려한 용모를 지닌 서방인이 고전양식으로 된 옷을 걸치고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처럼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은 고전미술에 익숙한 눈에는 아마 상당히 어색하게 비칠 것이다. 이것이 간다라 미술의 흥미로운 점이자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교사원과 불탑

[불교사원] - 불상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간다라 불교미술의 융성은 그 때부터 적어도 2~3세기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이 기간에 수 많은 불교사원과 불탑들이 건립되었다. 7세기 전반 인도를 순례한 중국의 승려 현장에 따르면, 간다라국(페샤와르 분지)에는 1000여 곳, 웃디야나국(Uddiyana, 스와트)에는 1400곳, 카피시국(카불 분지)에는 100여 곳의 불교사원들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간다라 미술의 전성시대로부터 몇 세기 뒤인 이 시대에 이 사원들은 대부분 황량한 폐허로 변해 있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많은 수의 사원들은 이 지역에서 불교가 얼마나 성대히 신앙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잘 알려준다.

그 중에서는 특별히 규모가 큰 사원들도 있었다. 우선 쿠샨제국의 수도인 푸루샤푸라(페샤와르)에 카니슈카가 세운 승원과 불탑을 꼽을 수 있다. 이 승원은 여러 층의 집과 잇대어진 정자, 높은 전각, 깊숙한 방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불탑은 높이가 무려 400척(약 100m)이 넘었다고 한다. 지금 페샤와르시의 외곽에는 샤지키데리(Shah-ji-ki-dheri)라는 유적이 그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는데, 20세기 초 이곳에 대한 발굴에서는 카니슈카왕이 바쳤던 사리기(舍利器)가 발견된 바 있다. 탁실라에는 시르캅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르마라지카(Dharmarajika)라는 대규모 사원지가 있다. 이 사원지에는 아쇼카왕 때까지 기원이 올라간다고 생각되는 거대한 불탑과 승원이 남아 있다. 웃디야나국에도 수도인 밍고라(Mingora)에 붓카라(Butkara) 제1유적이라고 명명된 커다란 사원지가 있다. 원래 타라(Tara, 陀羅寺)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사원지에도 아쇼카 때 처음 세워졌던 불탑이 발굴되었다. 중국의 구법승들의 기록에는 이밖에도 수 많은 특기할 만한 사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승원] - 간다라의 불교사원은 인도 본토의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승원과 불탑으로 구성되었다. 승원(僧院) 혹은 승방(僧房)은 승려들이 수행과 생활 공간이다. 승원 건축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가운데에 네모난 뜰이 있고 그 네 변을 따라 방들이 놓여지는 형식이다. 방들은 뜰 쪽으로 입구가 나는데, 각가 대체로 한변이 2m 남짓 되어 한 사람의 승려가 기거하기에 적합한 크기이다. 안쪽 벽에는 작은 보주(寶珠)형의 감(龕)이 나 있어서, 이 안에 등잔을 놓거나 선반 같은 용도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에서 승려들은 참선을 하고 경전을 읽으면 수행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전시회의 출품작들 가운데에는 승려들이 쓰던 등잔이나 필기용 잉크를 담았던 작은 그릇들도 포함되어 있다.

승방 구역의 가운데 뜰에는 보통 한 구석에 목욕 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그 옆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가 나 있다. 그리고 승방에 잇대어 부엌과 식당이 위치하는 경유가 많다. 이와 더불어 사원 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으로 강당(講堂)이 있다. 강당에서는 수계(受戒)의식이나, 한 달에 두 번씩 있던 참회 의식인 포살(布薩), 그 밖의 의식과 집회가 열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승방은 때로는 방 몇 개가 일렬로 연결되는 형태로 만들기도 했다. 주로 이런 승방은 산지에서 공간이 충분치 못한 경우에 등장하는데, 마치 우리 사찰의 작은 암자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승방 건물은 이층 이상의 다층으로 지어지기도 한다.

[불탑] - 간다라의 불교사원에서 가장 성스러운 예배 대상은 불탑이었다. 불탑이 없는 불교사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교사원에서 불탑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던 것이다. 불탑(佛塔)은 문자 그대로 ‘부처님의 탑’이라는 말이고, 여기서 ‘탑’이라는 말은 인도말로 ‘스투파(stupa)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투파는 당시 인도의 불교도들이 쓰던 속어에서 ‘투파(thupa)’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투파’는 한문으로 옮기면서 ‘탑파(塔婆)’라고 쓴 것이고, 이것을 줄여서 ‘탑’이라고 하는 것이다.

스투파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에 들자, 그의 시신을 화장하여 남은 유골인 사리(舍利)를 모시기 위해 둥근 봉분(封墳) 형태의 기념물을 만들었던 데 그 기원이 있다. 붓다를 화장한 직후 붓다의 유골을 놓고 여러 종족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하면서 다툼이 벌어졌다. 그래서 중재 끝에 유골은 팔등분되어 인도의 여러 곳으로 옮겨져 모두 여덟 개의 스투파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200년 뒤 불교에 귀의한 아쇼카왕은 그 여덟 개의 스투파 가운데 일곱 개를 열어(라마그라마의 탑은 그곳을 지키는 코브라들 때문에 열 수 없었다고 한다), 모두 팔만 사천 개의 스투파를 인도 각지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팔만사천’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 이러한 전승을 그대로 막을 수는 없지만, 아쇼카가 스투파 숭배를 크게 진작시켰던 것은 사실이다. 인도 각지에는 아쇼카 때까지 기원이 올라가는 스투파들이 많이 남아 있고, 간다라에서도 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 대탑이나 스와트의 붓카라 대탑이 그러한 예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간다라 지역에서도 불교 전래 초기부터 많은 스투파들이 단독으로, 혹은 불교사원의 일부로 건립되었다. 인도 본토의 스투파들은 예외 없이 기단의 평면이 원형이고 대개 그 둘레에 둥근 울타리가 쳐져 있었던 데 반해, 간다라의 스투파들은 울타리를 지닌 예가 거의 없다. 기단이 원형인 경우도 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 대탑이나 스와트의 붓카라 대탑과 같이 역사가 아주 오랜 스투파들을 제외하고는 매우 드물다. 그 대신 간다라에서는 방혀평면의 기단이 선호되었는데, 이것은 로마의 제단(祭壇) 건축의 영향이라는 설명도 있다. 또 이러한 방형의 기단 위에 반구형의 복발(覆鉢)이 그대로 얹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여러 단의 원통형 드럼이 놓여져서 수직적으로 상승하는 느낌을 주었던 것도 인도 본토의 스투파들과 다른 간다라 스투파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불교사원 안에는 가장 성스러운 예배대상으로서의 하나의 주된 탑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주탑(主塔)이라고 한다면, 간다라의 사원에는 주탑 주변에 그보다 규모가 작은 탑들이 수십 기(基)씩 세워졌던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소형 탑들은 붓다 이외에도 고승이나, 왕 그밖의 지체 높은 재가 신도들의 명복을 빅기 위해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주탑을 비롯한 스투파들의 내부에는 사리를 담은 토기나 금속기가 봉납되어 있었다.그 속에는 작은 유골 조각 외에 구슬이나 값진 보석, 화폐 등이 함께 넣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러한 사리기들은 일찍부터 보물을 찾는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곤 했고, 이에 따라 사리기들이 스투파의 내부에서 온전히 남아 있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불당과 불감] - 간다라의 사원에는 예배 공간으로서 불탑 외에 불상을 모신 불당(佛堂)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불당들은 매우 드물게 볼 수 있을 뿐이다.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 사원이나 스와트의 붓카라 사원에 대형 불당의 유구(遺構)로 추정할 수 있는 건물지가 있지만, 이들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그보다 작은 크기의 불당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불상을 봉안하는 공간으로서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감실(龕室)형의 사당들이다. 감실형 사당이란 불상 하나를 봉안 할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작은 감실을 만든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대체로 평면이 방형이고, 높이 1m 내외의 단위에 세워졌다. 이러한 사당들은 단독으로 만들어진 경우는 거의 없고, 단 위에 여러 개가 연이어서 늘어서는 형식으로 흔히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러한 감실형 사당을 필자는 ‘열립(列立) 감형 사당’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열립 감형 사당들은 특히 불상이 많이 출토되는 페샤와르 분지의 탁트이바히(Takht-Bahi) 사원을 예로 들면, 이 사원에는 주탑을 모신 구역의 둘레에 십여 개의 감형 사당들이 늘어서 있었고, 소형 봉헌탑들이 모여 있는 구역의 둘레에도 이십여 개의 감형 사당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사당은 불교조각이 성행하던 당시 인도의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연속적으로 늘어선 감에 상을 안치하는 관습은 로마에서도 볼 수 있고, 중앙아시아의 니사(Nisa)에 있는 파르티아 시대 건조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형식의 종상 봉안법은 그러한 서방의 건조물들로부터의 영향 아래 생긴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간다라의 경우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이 열립한 감에 서로 다른 시상들이 아닌, 아마도 거의 같은 존면(尊名)의 불.보살상들이 나란히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간다라의 불상들은 대다수의 동아시아 불상들과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즉 대부분 동아시아 불상들이 한 불당의 유일무이한 주인으로서 봉안되고 예배되었던 데 반해, 간다라의 불상들 하나하나에는 그러한 특별한 의미가 결여되어 있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다. 간다라의 불교도들에게 불상은 봉헌 행위를 통해 공덕(功德)을 얻기 위해 매개체적인 성격이 더 강하지 않았던가 여겨진다.

어쨌든 간다라의 불교사원에서는 같은 시대 인도의 마투라를 비롯한 어느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많은 불상과 보살상들이 출토되었다. 예를 들어 탁트이바히 같은 사원지에서 출토된 불.보살상은 확인된 예들만도 수십 점을 헤아린다. 19세기말 로리얀탕가이(Loriyan-Tangai) 사원지가 발굴되었을 때 촬영된 사진도 역시 그러한 상황을 여실히 증언해 주고 있다.

불상과 보살상

[불상] - 간다라의 불교사원에 봉헌되었던 상들의 주류는 석조 불상과 보살상들이었다. 이러한 불상들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입상이 대다수 차지하고 있고 크기도 상대적으로 큰 편이어서, 입상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양쪽 어깨를 가린 통견(通肩) 형식으로 옷을 입고, 오른손으로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手印)을 취한 거의 한결 같은 형식이다. 간혹 몸을 약간 옆으로 돌려 아랫쪽으로 발우(鉢盂)를 내밀고 있는 예가 있는데, 이것은 아쇼카왕이 전생에 어린 아이였을 때 부처님께 진흙을 보시하여 나중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수 있는 공덕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나타낸 것이다. 또 이와 약간 다른 모습으로 몸을 옆으로 향하여 아래를 내려다 보는 상들이 여러 점이 남아 있다. 대부분 훼손이 심하지만, 원래 이러한 불상들은 독사가 담긴 발우를 들고 있었다. 이 상은 붓다가 배화교도였던 우루벨라 가섭의 불(火)의 사당에서 조복(調伏)한 독룡(毒龍)을 가섭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를 도해한 것이다. 이러한 예외들을 제외한다면, 불입상은 매우 단조로운 정면관의 자세를 보여준다.

불좌상으로는 시무회인, 설법인, 선정인의 수인을 취한 상들이다. 시무외인과 선정인을 취한 불좌상은 일관되게 통견의 복장을 하고 있는 반면, 설법인 좌상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복장을 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불상들에는 존명(尊名)이 새겨진 예가 거의 없고 도상의 패턴 또한 매우 단조롭기 때문에, 이들이 각각 어떤 붓다를 나타냈는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시무외인, 설법인, 선정인 등 여러 수인이 각각 특정한 불상을 의미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당시 불교의 상황으로 보아, 아무래도 석가모니 붓다의 상이 대다수를 차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존명이 새겨진 몇 안되는 명문 가운데 연등불(燃燈佛)과 가섭불(迦葉佛)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세에 출현했었다고 믿어지는 연등불이나 가섭불과 같은 과거불상들, 56억년 뒤에 세상이 나타나 중생들을 구제하리라는 미래불인 미륵(彌勒)불상 등도 현존하는 불상들에 포함되어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 밖에 대승불교에서 널리 숭배된 아미타(阿彌陀)불상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아미타불’이라는 존명이 새겨져 있다는 불삼존상도 학계에 알려져 있으나, 그 정확한 실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정례적인 형식의 불상 외에 특별한 형식으로 고행(苦行)불상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고행상은 석가모니가 해탈을 얻기 전 단식 고행을 하던 시기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은 이러한 고행이 그를 해탈로 이끈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었다. 즉 그는 극단적인 고행이 결코 해탈로 이르는 지혜를 중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행을 포기하여 중도(中道)를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간다라의 불교도들은 석가모니의 고행을 매우 인상 깊게 받아 들였고, 깨달음에는 그러한 철저한 수행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간다라에는 다른 지역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고행상들이 상당히 많이 만들어졌고, 그 중에서도 현재 라호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행상은 간다라 미술을 대표할 만한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보살상] - 간다라에서는 불상만큼이나 보살상도 많이 만들어져서 사원에 봉헌되었다. ‘깨달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의미의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는 말은 원래 석가모니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 말은 석가모니가 수 많은 전생에서 사람, 동물 등 여러 모습으로 태어나 선업(善業)을 쌓던 시절에 대해서 쓰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불교도들이 석가모니 이외에 과거와 미래, 또 현재의 다른 많은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붓다들을 상상속에 그려내면서 보살이라는 말은 그러한 모든 붓다들에게 대해서도 쓰이는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다. 한편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대승불교도들은 지혜로써 진리를 구하고 자비로써 다른 중생들을 구제하는 보살을 그들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덕목들을 인격적인 화신으로서 구체화한 많은 보살들을 창조하였다. 지혜의 화신 문수(文殊)보살, 자비행의 화신 보현(普賢)보살, 중생들을 현실의 여러 고난에서 구제하는 관음(觀音)보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보살들은 상(像)으로 만들어지면서 세속인으로서 가장 훌륭한 차림새를 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터번을 쓰고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 장신구를 걸친 왕공(王公)이나 귀족, 브라흐만과 같은 모습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차림새는 기본적으로 인도의 세속적인 복장에 기초한 것으로서, 이미 인도 본토의 바르후트(Bharhut, 기원전 1세기)나 산치(sanci, 기원후 1세기) 스투파의 조각에서 천인이나 약샤의 복장을 기초로 보살상의 형식을 확립했던 곳도 간다라였다고 생각되며, 이곳에서는 인도의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하게 보살상들이 만들어졌다.

간다라의 보살상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그 중에서 미륵불의 보살형인 미륵보살을 가장 확실하게 알아 볼 수 있다.미륵보살은 과거칠불과 미륵보살이 나란히 서 있는 장면에서 일관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게 때문이다. 즉 머리카락을 리본 모양(束髮形), 혹은 커다란 상투모양으로 묶고 수병(水甁)을 든 모습이 간다라의 전형적인 보살상이다. 간다라의 보살상 중에는 이 미륵보살상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터번을 쓰고 왼손을 옆구리에 댄 형식은 흔히 싯다르타 보살상으로 여겨진다. 붓다의 일생을 그린 부조들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흔히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밖에 연꽃이나 꽃다발을 든 보살상들도 한 유형을 이루는데, 이러한 상은 흔히 관음보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살상에는 입상과 결가부좌상 외에, 등받이 없는 작은 걸상에 앉아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있는 반면 반가좌(半跏坐)와 다리를 앞에서 교차하여 앉는 교각좌(交脚坐)와 같은 특이한 자세들도 등장하였다. 반가좌는 붓다의 일생을 그린 부조들에서 싯다르타가 첫 선정에 든 모습을 표현하는데 쓰이기도 했지만, 연꽃을 들고 있어서 관음보살로 추정되는 반가보살상들도 있다. 또 어떤 반가보살상은 경전을 들고 있어서 혹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중국의 초기 불교미술에서 교각 자세의 보살상은 거의 예외 없이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간다라의 경우에는 미륵보살처럼 수병을 든 예도 있고, 관음보살처럼 연꽃을 든 예도 있다. 따라서 간다라에서 반가좌나 교각좌가 각각 특정한 보살을 나타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했던 이러한 자세의 보살상들의 기원은 간다라에서 찾아도 무방할 듯 하다.

터번 앞에 작은 불상이 새겨져 있는 보살상들도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보살상이 흔히 관음보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특별히 흥미를 끈다. 그러나 간다라를 비롯한 인도에서도 터번 앞에 가루다(garuda, 독수리)가 나가(naga, 남자형의 코브라)나 나기니(nagini, 여인형의 코브라)를 붙잡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보살상들도 있는데, 이 모티브는 그리스 신화에서 독수리로 변신한 제우스신이 가니메데스(Ganymedes)를 낚아채 가는 장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이 보살상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해답이 제시되지 못한 형편이다.

[소조상] - 간다라 불보살상의 재로로는 석조 외에 진흙, 스투코와 테라코타가 있다. 스투코(stucco)는 석회에 모래 등을 개어서 굳힌 것이고, 테라코타(terracotta)는 진흙을 불로 구운 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다듬듯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소조상(塑造像)이라고 통칭(通稱)되기도 한다.

스투코와 테라코타는 간다라 조각사에서 상당히 일찍부터 사용되었다. 탁실라의 시르캅에서는 샤카, 파르티아 시대(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에 제작된 소조상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 바 있다. 이 이래 소조상들은 돌에 비해 재료가 구하기 쉽고 제작이 용이하다는 이점 때문에 꾸준히 사용되었다. 특히 간다라의 불교조각이 내리막길을 걸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스투코와 테라코타의 사용은 눈에 띄게 증대하였다. 그래서 간다라 미술 연구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마샬은 간다라 조각사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전기를 석조 조각의 시대, 후기를 소조 조각의 시대로 특징 짓기도 한다. 그와 같이 양분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소조 유물 중에 제작 시대가 늦다고 생각 되는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조각에 적합한 돌을 찾기 힘든 탁실라에서는 스투코와 테라코타가 특히 애호되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도 탁실라에서 출토된 소조상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아프카니스탄의 잘라라바드 부근에 위치한 핫다(Hadda)도 소조 조각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소조 유물들도 역시 시대가 비교적 내려가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불두들은 인도의 영향 아래 매우 감각적이고 고혹적인 자태를 보이는 예들도 있어서 눈길을 끈다.

불전 부조

[불전문학과 미술] - 앞서 불상의 탄생을 설명하면서, 불교사의 초창기에는 위대한 각자(覺者), 스승에 불과했던 붓다가 점차 신적인 존재로 고양(高揚)되어 갔던 것을 이야기한 바 있다. 붓다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그의 생애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졌다. 그러면서 붓다의 생애, 즉 불전(佛傳)에 대한 기술(記述)들은 보가 자세해지고, 신비로운 형태로 꾸며지기도 했다. 이런 문헌들은 흔히 ‘불전문학’이라고 부르는데, 『니다나카타(Nidanakatha)』,『랄리타비스타라(Lalitavistara, 普曜經 혹은 方鑛大莊嚴經)』, 『붓다치리타(Buddhacarita, 佛所行讚)』 등은 그 중에서 잘 알려진 예들이다. 이 중에 『붓다치리타』는 카니슈카의 궁정에서 활동했던 시인 아쉬바고샤가지었다고 전한다.

붓다의 신화적 생애는 미술로도 표현되어, 기원전 2세기 이래 인도에서는 스투파를 장식하는 부조들의 부요한 소재로 쓰였다. 그런데 이 시대 인도 본토의 주요한 스투파들인 바르후트, 산치, 아마라바티(Amaravati) 등지에서는 석가모니 붓다의 마지막 생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그의 전생 이야기들이 애호되었다. 이러한 전생 이야기들을 본생(本生), 또는 본생담(本生譚)이라고 하는데, 팔리어 대장경에는 모두 547가지의 본생담이 전하고 있을 정도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꾸며졌다. 이 이야기들은 석가모니가 전생에 수많은 선업을 지음으로써 비로소 붓다가 될 수 있었던 것을 강조하는 데에 의의가 있었으며, 불교 고유의 이야기들 이외도 많은 민담과 우화들이 채용되어 불교적인 이야기로 꾸며졌다. 물론 본생담 외에 석가모니의 마지막 생을 그린 불전 장면들도 도해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원후 2세기까지도 무불상 표현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불전 부조] - 간다라 사원에서는 붓다의 생애를 도해한 부조들로 불탑이나 그밖의 각종 건물들의 외벽을 장식하는 관습이 있었다. 특히 작은 봉헌탑들은 높이 20~40㎝의 석조 불전 부조들로 외벽이 장식되었다. 그 결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전 부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게 되었다. 인도 다른 지역의 불교미술에서도 불전의 도해들이 등장하지만, 간다라와 같이 불전의 많은 사건들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도해한 예는 없다. 이 점에 있어서 간다라의 불전 미술은 불교미술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다라의 불전 미술은 시간적으로 석가모니가 과거세에, 즉 연등불의 시대에 그 붓다로부터 장차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 예언)를 받았다는 소위 ‘연등불 수기 본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생의 석가모니가 연등불에게 꽃을 바치고 진창 위에 머리를 풀어 연등불로 하여금 밟고 가시게 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인도 본토와 비교해 볼 때, 간다라에서는 본생담의 경우 제한된 몇 가지만이 즐겨 도해되었고, 그 중에서도 ‘연등불 수기 본생’은 특별히 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등불 수기 본생’과 몇몇 본생담을 제외한다면, 간다라 불교도들의 관심은 석가모니 붓다의 마지막 생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야 부인의 꿈, 꿈의 해석, 탄생, 아기의 관상을 보는 아시타 선인, 학습과 무예 수련, 결혼, 궁중의 생활 등 잡다하리만치 많은 사건들이 조각으로 표현되었다. 싯다르타 태자는 몰래 성을 빠져 나와 옷을 바꾸어 입고, 브라흐만 스승을 찾아간다.

그리고 고행을 하고, 고행을 파기한 뒤, 보리수로 다가가 그 밑에서 조용히 명상에 잠긴다. 자신의 세력이 위축될 것을 두려워한 마왕은 딸들을 보내 싯다르타를 유혹하고, 마군(魔軍)을 동원하여 그를 위협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는 싯다르타는 조용히 땅을 짚어 지신(地神)을 부름으로써 마군을 물리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망설이던 그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의 권청(勸請)을 받고 사르나트의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한때 함께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첫 설법을 편다.

그 이후 그는 40여 년 동안 사위성(舍衛城), 왕사성(王舍城) 등에 주로 머물면서 걸림 없는 방편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고 제자로 삼았다. 그 동안 고향 카필라성의 방문, 도리천으로부터의 하강, 사위성의 대신변(大神變), 앙굴리말라의 조복, 여인들의 출가 등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80세 되던 해 쿠시나가라의 사라 쌍수(娑羅雙樹) 밑에서 제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그는 열반에 들었다. 간다라의 불전 부조에서는 이러한 수많은 일화들을 생생한 모습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삼존과 설법도 부조

[삼존과 설법도] - 간다라의 부조 가운데에는 주제나 형식 면에서 통상적인 불전 부조들과 구별되는 일군(一群)의 유물들이 있어서 주목된다. 우선 이들은 스투파나 그 밖의 건조물의 외벽에 부착되었던 통상적인 불전 부조들과 달리 비상(碑像)에 가까운 형식을 지니고 있다. 또한 크기도 불전 부조들보다 커서, 그 중에는 높이가 1-1.5m에 달하는 대형 부조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주제 면에서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커다란 연화좌 위에 앉은 설법 자세의 불좌상을 중심으로 양 옆에 보살입상이나 보살좌상이 배치된 삼존상 형식이다. 양 옆의 보살입상들은 대체로 수병을 든 미륵보살과 연꽃이나 꽃다발을 든 관음보살인 경우가 많다. 그 중앙의 불상은 석가모니일 가능성이 높다. 협시상이 보살좌상인 경우에는 반가좌와 비슷한 형상을 취한 예들이 많다. 이들은 꽃다발을 들기도 하고, 때로는 경전을 들기도 한다. 이러한 불삼존상들은 불상과 보살상들만으로 단순하게 구성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화려하게 장엄된 커다란 누각 속에 놓여지기도 했다.

다른 한 그룹은 많은 보살들이 모인 가운데에 붓다가 설법하는 자세로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형식이다. 라호르박물관 소장의 대형 설법도 부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물고기가 뛰노는 연지(蓮池)에서 솟아 오른 커다란 연꽃 위에 붓다가 장엄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 주위에는 많은 보살들이 다양한 자세로 앉아, 경탄하기도 하고, 꽃을 뿌리기도 하며, 생각에 잠겨 있기도 하고, 서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와 같은 대형 설법도 부조는 간다라 미술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에 상당히 많은 수가 만들어졌다.

[도상적 의미] - 이 두 그룹의 유물은 간다라 불교미술 연구의 선구자인 알프레드 푸쉐의 견해에 따라 한동안 불전에 나오는 ‘사위성의 대변신’이라는 설화를 나타낸 것으로 받아들여 지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는 거의 도해된 적이 없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설화는 사위성에서 석가모니가 외도(外道)를 조복하기 위해 수많은 신면(神變,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문헌에 나오는 ‘사위성의 신변’의 여러 전승(傳承)들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부조들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사위성의 신변’을 나타내는 것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된다.

이들은 그 같은 불전의 도해가 아니라 예배용 존상(尊像)과 같은 기능으로 봉헌되어 예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두 그룹 가운데 첫번째 그룹의 삼존 부조상들은 대승불교도들의 주요한 봉헌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마제보살경(須摩提菩薩經)』, 『이구시녀경(離垢施女經)』 등 간다라 지역과 연결기을 수 있는 몇몇 대승 경전에서는 공덕을 얻기 위해서 ‘연화 위의 불좌상’을 봉헌할 것을 권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삼존상들이 문헌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그 같은 대승불교도들의 봉헌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의 대형 설법도 부조상들에 대해서는 동아시아에서 발달한 아미타정토도와의 유사성이 일찍부터 지적된 바 있다. 즉 이 부조들이 동아시아의 예들처럼 서방극락정토와 그곳을 주재(主宰)하는 아미타불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이다. 이 부조들의 장면이 중국의 돈황(敦煌)석굴 벽화 등에서 볼 수 있는 아미타정토도와 상당히 유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형상적인 연관성은 인정하더라도, 간다라의 예들이 아미타정토의 모습을 나타냈다고 단정할 수 있는 증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이 장면들이 『무량수경(無量壽經)』 등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아미타 정토의 광경 뿐 아니라, 『법화경』과 『화엄경』 등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서술된 불타의 설법 장면과 매우 유사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면은 어떤 특정한 경전을 도해한 것이라기 보다는 대승불교도들의 삼매(三昧) 속에서 체험한 초월적 존재로서의 붓다와 그 불국토의 장엄상(莊嚴相)을 재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삼존상 부조들과 이와 같은 대형 설법도 부조들은 대승불교도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유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물들은 어떤 경위에서 대승불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일까?

불교사적 맥락

[부파불교와 유부] - 간다라 미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기원후 1세기는 불교사적으로 부파불교가 한창이던 시기이자, 대승불교가 막 대두되어 발돋움해 가던 시기였다. 붓다가 열반에 든 지 100념쯤 뒤에 불교 승단(僧團)은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의 두 파로 갈라졌고, 이 두 부파(部派)는 분열을 거듭하여 기원전후 무렵에는 모두 18개(혹은 20개) 가량의 부파로 나뉘어졌다. 이렇게 부파들이 분립한 시기를 불교사에서는 부파불교 시대라 부른다. 이 부파들은 대체로 서로 다른 지역을 거점으로 하면서 세력을 펴고 있었는데, 간다라와 마투라를 비롯한 서북인도와 북인도에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대중부, 법장부(法藏部) 등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특히 간다라 지방에서는 설일체유부(줄여서 유부)의 세력이 컸다. 카니슈카왕이 후원했던 불교도 설일체유부였는데, 페새와르에 세워졌던 카니슈카 사원은 이 부파에 소속되어 있었다. 또 파르쉬바, 마노라타(Manoratha), 바수미트라(Vasumitra), 다르마라타(Dharmaratha) 등 이 부파의 여러 논사(論師)들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부파의 봉헌 명문도 페샤와르 분지와 탁실라 등지에서 여러 점 발견된 바 있다. 이밖에 가섭부(迦葉部)와 법장부 등의 봉헌 명문도 발견되어서, 이 부파들에 소속된 사원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대승불교] - 그런데 동시에 간다라는 일찍부터 대승불교와의 인연이 깊은 곳으로 여겨져 왔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기원전 1세기경부터 흥기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주창자들은 이전의 불교 승단에서 이상으로 삼았던 ‘아라한(阿羅漢)’ 대신에 ‘보살’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또 스스로 보살이라고 자처하면서, 법을 이상으로 삼고 또 스스로 보살이라고 자처하면서, 법(法)과 붓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실천 윤리를 펴 나갔다. 이 운동의 핵심은 혼자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자리행(自利行)의 추구가 아니라, 진정한 지혜를 바탕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면서 진리를 추구해 가는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했던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불교를 ‘큰 수레’, ‘대승(大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으로 하나의 통일적인 조직을 이루지는 않았고, 『반야경』, 『법화경』,『무량수경』 등 초기 대승 경전을 짓고 따르는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승불교가 처음 등장했던 곳, 또 비약적인 발전을 했던 곳의 하나로 많은 학자들은 일찍부터 간다라에 주목해 왔다. 『법화경』, 『무량수경』 같은 초기 대승 경전들이 내용상 이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든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 대승 경전을 중국에 전하고 번역했던 승려들의 대다수가 이곳 출신이었다든지 하는 점들이 그 주요한 근거로 꼽혔다.

또 이 지방에서 출토된 명문(銘文)들에 “일체 제불(諸佛)의 공양을 위하여”, “일체 중생의 공양을 위하여”와 같은, 대승불교와 연결될 만한 구절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점도 그러한 심증을 뒷받침하였다. 대승불교의 철학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논사인 아상가(Asanga, 無着)와 바수반두(Vasubandu, 世親) 형제도 이곳 출신이었다. 전체적으로 대승불교도들은 간다라에서 설일체유부를 비롯한 부파불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열세였다고 생각되지만, 상당한 세력으로 전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5세기초 간다라를 방문했던 중국 승려 법현이 간다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소승을 공부하고 있다’(多小乘學)고 기록한 사실은 이 점에 있어서 상당한 의문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이 기록에 근거하여 간다라 또는 간다라 미술의 대승 관련설을 부정적으로 본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보살상들과 불삼존상 부조, 대형 설법도 부조 등은 간다라 미술이 대승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특히 이러한 유물들이 간다라 미술사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에 급격히 증가했던 사실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승불교도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던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법현의 전언(傳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은 법현 당시까지도 대승불교도들이 대부분 기존의 소승 부파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불보살상, 삼존 부조, 대형 설법도 부조들이 다량으로 출토된 탁트이바히와 사흐리바흐롤(Sahri-Bahlol) 사원지에서는 가섭부(Kasyapiya)의 봉헌 명문이 발견되어, 이 사원들이 가섭부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승과 관련 있는 그러한 수많은 봉헌물들이 이 사원의 승려들과 무관하게 바쳐졌다고 볼 수는 없고, 이 가섭부의 사원에서 대승불교도들의 활동이 특별히 활발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리라고 생각된다.

양식적 연원과 편년

[양식적 연원] - 간다라 미술이 양식적으로 지중해 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느 단계의 서방 고전미술과, 또 어떤 형태로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논란이 있어 왔다. 이에 관한 여러 견해 중에 첫째로 간다라 미술의 양식적 원류를 헬레니즘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푸쉐에 의해 처음 개진된 이 견해에 따르면 간다라 미술은 헬레니즘의 영향 아래 성립되었고 점차 그 헬레니즘 양식이 쇠퇴해 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견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본격적인 간다라 미술의 시작이 서력 기원 이전으로 올라가기 힘들고, 그 때쯤 이미 지중해 세계에서는 로마가 새로운 문화의 주인공으로서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의 학자들은 간다라 미술이 로마 미술과 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이들의 주장은 간다라 미술이 성행했던 시기에 지중해 세계에서는 이미 로마제국이 흥성했으며, 양식적으로도 간다라 미술을 이전에 유입되었던 헬레니즘 양식이 자생적으로 발전한 결과라고 보기 힘들다는 추론에 근거한다. 벤저민 로울랜드 같은 학자는 로마 미술 발전사의 각 단계에 상응하는 양식을 간다라 미술에서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고까지 이야기 한다. 간다라 조각에서 로마 조각과 방불한 양식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간다라 미술에는 로마 미술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 또한 상당히 크다. 간다라 미술을 전적으로 로마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는 데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1960년대 이래에는 지중해 세계와 간다라 사이에 위치한 이란 미술의 역할을 중시하는 입장이 많은 학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즉 셀레우코스 제국의 쇠퇴와 함께 이란을 비롯한 서아시아에서 등장한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미술, 그리고 이보다 조금 늦게 서북인도와 북인도를 장악했던 쿠샨의 미술을 ‘그레코.이란 미술(Greco-Iranian art)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범주 안넹서 이해하려는 견해이다. 이 입장에서는 간다라 미술에서 단순히 서방 고전미술의 영향을 찾기보다 그 매개자였던 이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레코.이란 미술 영향설’ 또는 ‘이란풍 불교미술설’(Irano-Buddhist art)은 단순한 헬레니즘 영향설이나 로마 영향설보다 여러 면에서 진일보한 견해로 보인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광대한 지역에서 발달한 다양한 조형적 흐름을 지나치게 단일화, 또는 단순화하여 파악한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느 입장에서건 그 동안의 연구는 서방과의 관계에만 지나치게 집착해 왔다는 인상이 강하다. 간과되었던 것은 간다라 미술의 독자적인 특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편념] - 간다라의 미술이 어떤 순서로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었는가 하는 문제도 아직까지 난제로 남아 있다. 그 동안 간다라 미술의 편년과 발전과정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많았지만 어느 것도 성공적이었다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이러한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간다라의 조각 유물 중에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점에 기인한다. 연대가 새겨진 상들이 몇 점 있기는 하지만, 이 연대들이 어느 기원에 해당하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연대 판정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차선책으로 로마 미술이나 파르티아 미술과의 양식 비교를 통하여 편년을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들도 결코 설득력 있는 결과를 낳지는 못했다. 로마 미술에 정통한 학자들은 간다라 미술에서 로마의 영향을 먼저 읽었고, 이란 미술에 조예가 깊은 학자들은 이란적인 요소를 더 강조하였다. 간다라 미술 자체 내의 변화와 동인(動因)을 간과한 채 그 발전사를 서방 고전양식에 종속시켜 설명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간다라 미술 연구자들은 편의상 다음과 같은 대략적인 연대관을 받아들이고 있다. 간다라 미술은 서기 1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전성기는 서기 2세기 카니슈카의 즉위 후 약 1세기간이었을 것으로 본다. 쿠샨왕조 시대의 안정된 정치 상황과 적극적인 후원이 불교미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다. 쿠샨은 카니슈카 즉위 후 1세기(서기 3세기 전반)를 기점으로 쇠락했고, 그 무렵 이란에서 흥기한 신흥 사산(Sasan)왕조의 침입을 받았다. 그 이후에 이곳에서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어 불교사원이나 미술에 대한 후원이 전과 같이 안정적이지 못했고, 불교미술도 쇠퇴를 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토착적인 요소와 인도로부터의 영향이 점차 강하게 대두되었고, 상대적으로 고전적인 양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쇠퇴가 어느 정도의 기간을 두고 이어졌던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필자는 간다라 조각의 전성기를 카니슈카 이후 약 2세기 동안으로 보고 있지만, 이것도 확실한 근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심증에 가깝다.

520년 승려 혜생(惠生)과 함께 간다라를 방문했던 중국의 송운(宋雲)은 두 세대 전에 에프탈리테스(Ephthalites)의 침입으로 이 지역이 황폐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에프탈리테스는 훈족의 한 갈래로 알려져 있는데, 5세기 중엽부터 6세기에 걸쳐 서북인도와 북인도에 침입하여 약 1세기간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보통 학자들은 이 시점을 계기로 불교가 급격히 쇠락하고 고전양식 또한 몰락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에프탈리테스의 침입이 미친 영향이 과장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간다라 그 이후

[간다라 미술의 황혼] - 쿠샨 제국의 번영은 약 1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242년 샤푸르(Shapur) 1세의 침입으로 시작된 이란의 사산왕조의 연이은 공세로 인해 쿠샨은 사산의 지배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350년경에는 월지(月氏)의 일족이라고 생각되는 키다라(Kidara)가 남하해 와서 간다라를 지배했고, 이들은 키다라.쿠샨이라고도 불렸다.

한편 인도에서는 320년 굽타(Gupta) 왕조가 새로이 발흥하여, 4세기 후반 북인도와 중인도를 장악한 거대한 통일 왕조로 등장하였다. 흔히 고전시대라고 불리는 이 왕조 시대에 문학, 미술, 종교 등 문화의 여러 부문에서 후대 인도와의 전범(典範)이 된 성취들이 이루어졌다. 특히 5세기에는 마투라와 사르나트를 중심으로 새로운 양식의 고전적인 조각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반면 간다라 지역은 상대적으로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송운의 전언(傳言)을 따른다면, 460년경에는 에프탈리테스의 침입이 있었다. 그 영향이 간다라의 불교교각을 절멸(絶滅)시킬 정도는 아니었더라도 상당한 타격을 주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630년대에 현장이 이 지역을 찾았을 때 천여 곳에 이르는 페새와르 분지의 불교 사원들은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고, 사람들은 대부분 힌두교를 믿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독자적인 왕국이 없었고, 카불에 위치한 카피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스와트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불교사원은 대부분 황폐해 있었지만 불법을 존숭하고 대승을 신앙하고 있었다. 탁실라는 한때 카시피국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당시에는 카슈미르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8세기 전반에는 신라 출신의 혜초(慧超)가 이 지역을 여행했다. 704년 신라에서 태어나 십대의 나이에 중국에 건너가 불법을 공부했던 혜초는 723년부터 727년까지 서역과 인도, 서아시아를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중국에서 일생을 마쳤던 혜초는 이 순례 여행 중에 간다라 지역을 방문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돌궐 왕이 카피시국을 물리치고 페샤와르 분지 일대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 돌궐족도 삼보(參寶)를 매우 공경하여, 왕과 왕족들이 각각 절을 만들어 불교를 신앙하고 있었다고 한다. 카니슈카왕이 세웠던 절도 존속하고 있었고, 카니슈카의 대탑도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한다.

20세기초에 이루어졌던 이 유적(샤지키데리)의 발굴 당시에 촬영된 사진에서는 대탑의 기단부를 장식하고 있던 스투코 불상들을 볼 수 있다. 이 상들에 그레코.로마풍 양식은 매우 미미하게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오히려 잘록한 허리를 비롯한 유감적인 몸매, 몸에 밀착한 옷과 마치 무늬와 같이 선으로 새겨진 단순화된 옷주름 등은 굽타 조각에서 발원하여 인도 각지에서 발흥했던 조각 양식을 연상시킨다. 특히 8-9세기에 카슈미르에서 제작된 청동상들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서, 이 스투코상들도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늦은 시기에도 불교미술 활동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하고 할 것이다.

9세기부터는 힌두교를 믿는 소위 힌두.샤히(Hindu.Sahi) 왕조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며, 이 시대에 불교는 더욱 위축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0세기에는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가즈니(Ghazni)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왕조가 흥기하여, 이들은 머지않아 힌두.샤히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프가니스탄과 서북 인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간다라의 불교와 불교미술은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불교미술의 동점] - 동서 문화의 경이적인 결합을 통해 이룩된 간다라 미술은 이 지역에 한정된 역사 속에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고, 보다 광대한 지역에 걸쳐 후대의 미술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 영향은 가까운 인도뿐 아니라 동쪽으로 서역과 동아시아에 전해져 이들 지역의 불교미술 발전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간다라 미술의 대외적인 영향은 도상(圖像)형식과 미술양식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간다라에서 창안된 불교미술의 여러 도상형식들은 인도, 서역,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그대로 수용되거나 새로운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간다라의 불상 형식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불상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경주의 황복사지(皇福寺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여래입상에서도 수 세기 전 간다라 불상의 원형(原型)이 그래도 간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보살상의 도상형식을 확립한 것도 간다라의 불교도들이었을 것이라고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러한 형식은 서역과 중국에 전해져 그곳 나름의 보살상 형식이 형성되는 데에 기촉 되었다. 간다라에서 확립된 반가상이나 교각상 같은 특별한 자세의 보살상 형식들도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5세기 중국의 돈황(敦煌) 석굴이나 운강(雲岡) 석굴에는 간다라의 예를 본받아 무수한반가상과 교각상들이 새겨졌으며, 이것이 장차 7세기에 들어서서 우리 나라에서 대형 반가사유상들이 조성되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간다라에서 크게 발달했던 불전(佛傳) 도해의 전통은 인도의 불전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쿠샨 시대 마투라와 굽타 시대의 불전 부조, 아잔타 석굴의 불전 벽화에서는 간다라의 불전 미술에서 유래한 유형화된 장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키질, 쿠차 등 서역북로(西域北路)의 석굴사원과 돈황, 운강 석굴의 불전 벽화와 부조에서도 간다라의 영향은 짙게 나타난다.

그밖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아미타삼존상이나 아미타정토도는 간다라의 삼존불상들이나 대형설법도 부조들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간다라의 예들이 아미타불상이나 아미타 정토를 나타낸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러한 유형의 장면들을 토대로 동아시아에서 아미타삼존상이나 정토도가 발전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한편 미술양식 면에서는 간다라의 영향을 그리 명쾌하게 이야기하기 힘들다. 인도에서는 이미 높은 수준의 독자적인 조각 전통이 존재했기 때문에 간다라의 서방 고전양식의 영향은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나머지 지역들에서도 지역과 민족에 따라 고유한 미감과 미술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도상형식 만큼 외래 미술양식이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만, 서역의 경우에는 사력 기원 초기부터 한동안 간다라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간다라 양식의 영향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서역 출토의 조각 유물들은 대부분 시기가 기원후 5세기 이후로 내려가는 것들이기 때문에 간다라의 영향을 순수하게 보여주는 것은 찾기는 쉽지 않다.

중국의 경우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3~4세기)의 금동불상들은 간다라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의 불상들에서는 간다라적인 요소가 그리 명확하지 않다. 5세기의 불상들에서 몸이나 옷의 입체적인 표현에 상당한 관심이 나타나 있는 것은 넓게 보아 간다라의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서역에서 이미 상당히 변모된 양식의 영향 아래에 있어서, 순수한 간다라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같은 이유에서 우리 나라 불교조각에 미친 간다라 미술의 영향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우리 나라와 간다라의 불교미술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었고, 어떤 영향이 있었더라도 대부분 간접적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간다라의 영향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극히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석굴암을 놓고 간다라 불교미술의 영향을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된다.

그러나 석굴암 불상과 간다라의 불상이 같은 붓다의 상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시각적으로 양자 사이에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기란 매우 힘들다. 그러나 간다라가 불상의 탄생지로서 후대의 많은 불상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야기한다면, 석굴암 불상의 연원이 간다라까지 올라간다고 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상황이 계속되어 불교사원이나 미술에 대한 후원이 전과 같이 안정적이지 못했고, 불교미술도 쇠퇴를 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토착적인 요소와 인도로부터의 영향이 점차 강하게 대두되었고, 상대적으로 고전적인 양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쇠퇴가 어느 정도의 기간을 두고 이어졌던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필자는 간다라 조각의 전성기를 카니슈카 이후 약 2세기 동안으로 보고 있지만, 이것도 확실한 근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심증에 가깝다.

520년 승려 혜생(惠生)과 함께 간다라를 방문했던 중국의 송운(宋雲)은 두 세대 전에 에프탈리테스(Ephthalites)의 침입으로 이 지역이 황폐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에프탈리테스는 훈족의 한 갈래로 알려져 있는데, 5세기 중엽부터 6세기에 걸쳐 서북인도와 북인도에 침입하여 약 1세기간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보통 학자들은 이 시점을 계기로 불교가 급격히 쇠락하고 고전양식 또한 몰락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에프탈리테스의 침입이 미친 영향이 과장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간다라 미술의 재발견

[식민지 시대] - 간다라 지역은 10세기 이래 천여년 간 이슬람교를 신봉한 서로 다른 왕조들의 통치를 받으며 이슬람화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슬람교도들은 우상 숭배를 배격했기 때문에 불교 사원이나 불상과 같은 이교도들의 사당과 우상들은 쉽사리 파괴되었고, 전혀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했다. 불교라는 종교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까맣게 잊혀져 갔다. 폐허가 된 불교사원은 더욱 두텁게 흙먼지에 싸여 그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많은 불상들은 그 속에서 잠자게 되었다. 우연히 발견된 불상들은 이 지역에 소수로 존재한 힌두교도들에 의해 원래의 이름을 잃어 버린 채 힌두교 신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8세기 중반 인도의 마지막 이슬람 지배자였던 무갈 왕조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유럽인들의 제국주의적 진출은 더욱 활발해졌다. 특히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제압하면서 인도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본격화하였고, 마침내 1858년 지금의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는 하나의 식민지로서 영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아프카니스탄만은 끝까지 영국과 러시아, 독일의 야망을 저지하고 독립을 유지하였다. 아프카니스탄과 접경과 페샤와르 분지와 스와트 등지는 이 거대한 식민지의 펀잡주에 속했다가 1901년 서북변경주(西北邊境州)로 분리되었으며, 이 이름의 행정단위는 파키스탄의 독립 후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유럽인 연구자들] - 영국인들의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가 확립됨에 따라 간다라 지역에도 적지 않은 유럽인들(주로 군인들)이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을 통해 19세기초 이 지역에 있는 서방 고전풍의 조각들은 처음으로 바깥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지역의 불교사원과 불교조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 사람은 알렉산터 커닝햄이다. 원래 영국군 공병 장교 출신인 커닝햄은 은퇴 후 인도의 초대 고고학조사관으로 임명되어 간다라의 많은 사원지들을 조사하고, 부분적인 발굴을 통해 많은 불보살상들, 부조들을 수습하였다.

이러한 유물들은 1860년대에 처음 개설된 페샤와르 임시 박물관에 보관되거나, 유럽으로 반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유물을 싣고 유럽으로 향하던 배가 침몰하여 많은 유물들이 수장된 에피소드도 있다. 커닝햄도 요즘 기준으로는 고고학자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그에 훨씬 못 미치는 무자격자들도 유물의 발굴과 수집에 앞다투어 참여하였다. 특히 마르단에 주둔하던 영국군 부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조각품들을 수집하여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 중에 일부는 이 부대의 장교식당의 벽난로를 장식하는데 쓰이기 까지 했다.

이러한 무분별한 발굴과 유물 수집에 종지부를 찍고 학술적인 조사가 확립된 것은 1899년 커즌이 총독으로 취임하면서부터였다. 인도의 문화재 보존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01년 케임브리지에서 고전고고학을 전공한 약관의 존 먀살(1876~1958)을 새로이 정비된 인도고고학조사국의 책임자로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20여년간 먀살의 지휘 아래 고고학조사국의 서북변경주 분국은 간다라 지역에서 활발한 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스푸너, 스타인, 하그리브스 등에 의해 탁트히바히, 사흐리바흐롤 등의 주요 유적들이 본격적으로 발굴되었고, 그 결과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는 매우 미흡하지만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보고문을 통해 소개되었다. 마샬은 1913년부터 십여년 간에 걸쳐서 직접 탁실라에 대한 발굴을 지휘하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의 소르본느에서 산스크리트학과 고고학을 전통한 알프레드 푸쉐도 19세기말 간다라 미술 연구에 뛰어든다. 그는 특히 불전 미술의 도상 해명에 주력하면서 1905년부터 1922년까지 총 세 권(실제로 2권 3부)에 이르는 『간다라의 그리스풍 불교미술』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출간하였다. 그는 박트리아의 그리스인 왕국이 간다라 미술의 탄생에 있어서 미친 영향을 해명하는데 집념을 잃지 않고 만년까지 아프카니스탄의 박트리아 유적 탐사에 주력하였다.

1920년대까지 아프카니스탄은 유럽 열강의 개입을 적대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유럽인 학자들이 갈망하고 있던 박트리아 유적에 대한 탐사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중앙아시아 탐사로 이름을 높였던 영국의 오럴 스타인도 그러한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푸쉐는 1923년 스타인을 따돌리고 비로소 프랑스인들의 아프카니스탄내 고고학 유적 조사 독점권을 따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유 때문에 1979년 아프칸 내전이 일어날 때까지 아프카니스탄의 고고학 조사는 프랑스인들의 주도 아래에 있게 되었다.

1923년 마샬이 은퇴한 뒤에도 고고학 조사 작업은 되었지만, 간다라 지역의 경우 20세기 초와 같은 활발한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7년 파키스탄의 독립과 더불어 간다라 미술의 조사와 연구는 파키스탄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이래 파키스탄 정부의 고고.박물관국과 페샤와르 대학의 고고학과가 중심이 되어 간다라 유적의 발굴과 보존 박업을 활발히 전개해 오고 있다. 그러나 영국인, 이탈리아인, 일본인들의 발굴 작업 또한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파키스탄의 컬렉션들] - 간다라의 여러 사원지들에서 발굴.수집된 많은 유물들은 처음에는 1860년대에 개설된 페샤와르 임시박물관과 라호르박물관에 수장되었다. 특히 1867년 개관된 라호르박물관은 『정글북』 등 인도를 무대로 한 모험 소설의 저자로 잘 알려진 루디야드 키플링의 아버지인 존 록크우드 키플링이 초대 관장을 지냈던 곳으로 유명하다. 키플링의 소설 가운데 『킴』(1901)의 첫 부분에서는 이 라호르박물관의 불교 조각 컬렉션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페샤와르에는 1907년 본격적인 박물관이 개관되었고, 라호르박물관에 가 있던 일부 유물들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한편 탁실라의 발굴과 함께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자, 이 유물들을 수장.전시하기 위해 1928년에는 탁실라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되면서 라호르박물관 소장품의 일부는 인도령 펀잡주의 새로운 수도인찬디가르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과거에 라호르박물관 소장품으로 알려진 유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현재 찬디가르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다. 신생국 파키스탄에서는 수도 카라치에 1696년 국립박물관을 세우고, 이곳에 페샤와르박물관, 탁실라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던 유물들을 일부 이관하여 전시하였다. 스와트와 디르에서 새로운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됨에 따라 스와트군(郡)의 수도인 사이두샤리프와 디르군의 착다라에도 각각 1963년과 1979년에 박물관이 설치되었다. 최근에는 파키스탄의 새로운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 작은 박물관이 개설되었고, 앞으로 보다 큰 규모로 확대될 예정이다.

[구미와 일본의 컬렉션들] - 간다라 미술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은 일찍부터 상당히 높았다. 서양의 ‘위대한’ 미술 전통이 동양의 대표적 종교인 불교의 불상이 탄생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고, 지중해 세계의 미술양식이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동방에서 수백년 동안 꽃을 피웠던 사실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많은 조각 유물들이 수집.반출되어 유럽의 여러 박물관들에 수장되었다. 이 중에서 런던의 대영박물관 컬렉션이 양과 질의 양면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음으로 베를린의 국립인도박물관, 파리의 기메박물관, 런던의 빅토리아.앤드.알버트박물관도 중요한 컬렉션들이다. 파키스탄의 독립 후 이탈리아는 간다라의 유적 조사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적지 않은 유물들을 양도 받게 되어, 로마의 국립동양박물관도 스와트 출토 유물들을 중심으로 상당히 큰 컬렉션을 갖게 되었다.

사실상 동양에서 불교미술 연구를 처음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일본에서도 간다라 미술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생겨났다. 처음에는 문헌을 통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1960년대부터는 실제 유적 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지금까지도 발굴조사를 해 오고 있다. 타렐리, 메카산다, 차낙데리, 라니갓 등은 일본인들이 발굴한 주요한 유적들이다.

이와 아울러 일본에서 간다라 미술은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대중들의 열렬한 관심을 모았다. ‘실크로드’라는 말에 거의 센티멘탈하게 심취하는 일본의 문화소비자들에게 ‘간다라’란 말 또한 대단한 상업적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간다라 조각 유물에 대한 수집도 일찍부터 개인 소장가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지금까지도 일본은 간다라 조각의 가장 큰 구매자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중에 적지 않은 위작(僞作)들이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수십만 달러의 막대한 금액으로 구입된 보살입상이 위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언론에서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란은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지만, 이 보살상은 머리와 발목 이하, 손 등의 여러 부분들이 새로이 제작되어 조합된 것임이 거의 명백하다. 미국의 유수 박물관들에서 열렸던 <쿠샨 조긱>전시회와 일본의 나라(奈良)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던 <보살> 전시회에도 출품되어 많은 전문가들의 공인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이 보살상이 사실상 위작으로 판명된 것은 간다라 미술의 위작 유통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음을 예증한다고 항 수 있다.

실제로 현재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간다라 미술품들 중에는 진위가 의심스러운 작품들이 대다수이다. 국제적인 경매사들의 경매 출품작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일본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개인 컬렉션들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상쩍은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근래에 갑자기 학계에 알려져 많은 관심을 끌었고 이미 대부분 전문가들의 공인을 받은 작품들 가운데에도 의심을 떨칠 수 없는 작품들이 상당수 있다. 간다라 미술의 상업적 가치 상승과 상대적인 공급 부족으로 인한 이와 같은 위작의 양산과 유통은 이미 학술적인 문제로까지 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로부터 이제 간다라 미술에 비로소 과님을 갖기 시작한 우리 문화계와 학계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간다라 미술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지난 십여년 간 우리 나라의 학계와 문화계에서도 간다라 미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불교미술의 기원지로서, 동서문화 교류의 현장으로서 간다라는 많은 학자들의 시야에 들어와 있으며, 또 대승불교의 발생지로서, 불상의 탄생지로서 간다라는 우리 불교도들에게도 새로운 순례지로 떠오르고 있다. 또 일반인들 가운데에도 간다라 미술에 매혹되어 열광적으로 심취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다른 어느 지역의 불상보다도 간다라 불상에 쉽게 끌릴는지 모르겠다. 우리 나라 불교 미술 연구자들의 글에서도 간다라 불상에 대한 극찬을 종종 대하게 된다.이러한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 불상 양식의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는 서양 고전 양식에 내재한 이상주의적 표현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간다라의 불상은, 상징성이 강하여 종종 정말 우상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 많은 동양의 많은 불상들에 비해 어딘가 고상한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간다라 불상에서는 과장이 없는 고결한 성인의 인간적인 느낌을, 눈으로 보는 그대로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덧 우리 의식 속에 깊게 내면화 되어 있는 서양의 고전주의적인 표현에 대한 선호 때문일 수 있다. 즉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들이 젖어 든 서구화를 통해, 어떤 것이 성스럽고 고결해 보이고, 또 어떤 것이 고급스럽고, 조각다와 보이는가에 대해 어느덧 우리가 갖게 된 고정관념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간다라 미술을 서방 고전 미술의 한 갈래로서 퇴행적인 지방 양식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하는 견해도 있을 수 있겠다. 서방 고전미술의 기준에서 본다면, 간다라 미술은 대부분 형식화되고, 무미건조하고, 기술적으로도 어설프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면적인 형상만을 문제 삼으면서, 여기에서만 성취될 수 있었던 독특한 정신성의 표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기술적인 면이나 개인적인 감동의 범위를 넘어서는 예술적인 평가는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단순한 예술적인 평가를 넘어서 간다라 마술이 인류 문명사에서 동서간의 문화적 만남의 귀중한 예화로서 가지는 가치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천년 전 이곳에서는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의 신비로운 만남이 있었고, 그 결실인 간다라 미술은 그리스와 이란,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문명사의 거대한 이벤트를 창조하였다.

출처 : 가람불교미술회
글쓴이 : 바보세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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