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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명량대첩 이후의 이순신의 행적
항샘
2011. 4. 30. 19:06
명량대첩 전후 이순신의 행적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명량대첩.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겼다.
9월 17일, (전라남도 무안군 지도면) 어외도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삼백척이 먼저 와 있었다.
9월 19일, 전라남도 영광군 낙월면 칠산 바다를 건넜다.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니, 흉적들이 육지로 들어와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해질 무렵에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면) 홍농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정박시키고 잤다.
9월 20일, 새벽에 출항하여, (영광군 위도면) 위도에 이르니...
9월 21일, (옥구군 미면 선유도) 고구산도에 이르니....
10월 3일, 새벽에 출항하여 법성포로 다시 돌아왔다.
10월 7일, 소문에 "호남 안팎에는 적선이 없다."고 한다.
10월 8일, 출항하여 어외도에 이르렀다.
10월 9일, 일찍 출항하여 우수영에 이르니 인가도 인적도 없었다. 보이는 것은 참혹 뿐이었다. 소문에 "흉적들이 해남에 진치고 있다."고 한다.

그 이후...
10월 10일, 중군장 김응함이 와서 전하는데, "해남에 있던 적들이 많이 물러간 모양이다."고 했다.
10월 11일, 정탐을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에는 연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오정에 발음도에 이르니..
10월 13일, 탐후선이 임준영을 싣고 왔다. 그편에 적의 소식을 들으니, '해남에 들어와 웅거해 있던 적들은 7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 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몽땅 도망가 버렸는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신용 등이 적속에 들어가 왜놈들을 꾀어 내어 선비들을 죽였다"고 했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10월 14일, 아들 면의 전사 편지를 받다.
10월 15일, 척후를 흥양, 순천 등지의 바다로 내보내다.
10월 16일, 우수사와 미조항 첨사를 해남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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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해남에 있던 왜의 군량 322섬을 실어왔다. 명나라 수군이 강화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10월 29일, 보화도(목포시 고하도)에 이르니, 바람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알맞고 섬의 형세가 아주 좋으므로 진을 치고 집을 지을 계획을 했다.
11월 20일, 완도를 정탐하니, 적들이 없다고 했다.
11월 21일, 송응기가 산의 일꾼들을 거느리고 해남의 소나무 있는 데로 갔다.
11월 22일, 장흥에 있던 적들이 20일에 달아났다는 보고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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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1월 5일(양력 2월 8일)부터 9월 14일(양력 10월 13일)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다.
출처 : 진도아리랑연가
글쓴이 : 김길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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