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해전현장에서 바라본 이순신 리더십
해전현장에서 바라본 이순신 리더십
이순신 장군이 가신지 400년이 지난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 이순신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우리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한 영웅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작금의 이순신 신드롬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순신의 내면세계를 연구하고 인간성을 탐구하는 과학적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 일찍이 노산 이은상 선생은 이순신을 ‘정돈된 인격자’라고 분석한 바 있다. 흔히들 영웅은 난세에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영웅은 타고 나는 것이므로 후천적으로 길러내기는 어렵다는 ‘생래적 자질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다. 또 혹자는 이순신처럼 곧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는 전쟁과 같은 비상한 시기에는 그 진면목을 제대로 평가받지만 평화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한직이나 변방으로 내몰릴 수 있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용맹 뒤에는 인간적인 나약함이 숨어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 때문이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는 듯하다. 한 인격체의 인간성은 리더십이라는 형태로 외부로 표출된다. 위기나 전란의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한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낸 것인지 영웅이 한 편의 굵직한 역사를 쓴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이순신은 우리민족이 가장 숭앙하는 역사적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이순신 신화는 세계 해전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며 그의 생애 자체는 한 편의 드라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도록 한 근원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서 필자는 이순신 장군이 싸워서 이긴 해전현장을 따라가면서 그 분의 리더십을 조목조목 짚어보기로 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난중일기나 선조실록과 같은 문헌에 기초한 작업도 중요하지만 그가 활동했던 현장을 둘러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1. 철저한 사전준비
가. 전라좌수영에서의 전쟁준비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여수는 수군 기지로는 천혜의 요충이었다. 진남관에서 내려다보면 왼쪽 오동도로 나가는 수로와 오른 쪽 돌산대교 아래 장군도 사이로 진출하는 수로를 사이에 두고 좌수영 터는 완벽한 요새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온 이순신 장군은 여기서 장차 닥쳐올 전란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수시 시전동 708번지 일대에는 거북선을 비롯한 전선을 만들던 선소가 남아 있다. 선소 일대는 호수와 같은 만이었으며 배를 정박시켰던 굴강 가에는 무기 제작소로 추정되는 대장간과 무기를 보수하던 세검정, 군기창고 등이 남아 있다. 선소 마을 뒤에 있는 망마산은 왜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병사들에게 피나는 훈련을 시켰던 곳이다. 이순신은 1년 2개월 동안 이 곳 전라좌수영에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사전 준비를 한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보름 전에 거북선의 시험운항에 성공하고 하루 전날인 1592년 5월 22일(이하 날짜는 모두 양력)에는 여수 앞바다에서 기동훈련을 하면서 거북선에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탑재하여 시험 발사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1592년 6월 13일 새벽에 그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건조한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을 이끌고 적이 날뛰는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하여 최초로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후 연전연승 할 수 있었다.
나.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준비상황
한산도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수로 상에 있는 섬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목장으로 썼던 섬이다. 한산만은 천혜의 수군 기지로 일찍이 명나라 장수 장홍유도 지세를 살펴보고 과연 진을 둘만한 곳이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한산도에서 왜군에게 치명타를 가한 한산대첩 이듬해인 1593년 8월 10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에서 한산도 두을포로 진을 옮겼다. 그해 9월 24일에는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이순신 장군은 통제영 시설을 창건하고 군비증강에 총력을 기울인다. 배의 척수에서 절대 약세였던 조선수군은 전선 건조에 주력하여 진을 옮겨올 당시 충청수군을 합쳐 143척이었던 전선이 250척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왜군의 조총과 성능이 비슷한 총통을 시험제작하고 각 진포에 보급하여 만들도록 하였다. 인근의 백성들을 불러 모아 둔전에 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확보하는 한편 질그릇을 구워 내다 팔아 군수품을 비축하였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병사들이 멀리까지 과거를 보러 가지 않고도 진중에서 과거를 볼 수 있도록 조정에 주청하여 1594년에 한산도에서 첫 무과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한산도에서 이렇게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왜군은 결코 견내량(현재 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을 잇는 거제대교 아래의 협소한 수로) 서쪽 지역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통영 연안여객선터미날에서 배를 타고 약 30분이면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한산도 제승당에 갈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3년 8월10일 여수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긴 후 정유재란 때인 1597년 4월 1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될 때까지 이곳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생활하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전력증강에 힘썼다. 한산도를 한 바퀴 돌아보면 지명만 보아도 당시의 상황을 대충 알아볼 수 있다. 통영 앞바다에서 한산도 제승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대나무가 자라는 섬이 두 개 있다. 대섬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화살을 만들기 위하여 조선수군이 대나무를 길렀던 곳이다. 제승당으로 들어가는 해로 좌측에 있는 비추리는 전선을 건조하던 곳이다. 하포荷浦는 순수 우리말로 ‘멜개’라고 불리는데 군수품을 하역하던 곳이며, 야소골은 야금을 하여 무기를 만들었던 장소다. 현재 한산면 소재지가 위치한 진두는 조선수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진터골은 진터가 있었던 골짜기로 병사들이 훈련하던 곳이고 근처에는 화살을 만들기 위해 작은 대나무를 심었던 죽전(竹田)이라는 지명도 있다. 진터골에서 가까운 바닷가에는 못을 파서 물을 공급하던 못개가 있다. 제승당에서 동쪽으로 약 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염개는 병사들이 먹을 소금을 생산하던 염전이 있었던 곳이다. 병사들이 훈련을 마치고 옷을 빨아서 말렸던 바위를 옷바위 또는 의암衣岩이라고 하는데 최근에 해안도로를 개설하면서 훼손되었지만 아직도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제승당 입구 바닷가에는 ‘정井’이라는 우물이 남아 있다. 바다와 붙어 있지만 사철 맑은 샘물이 솟는 우물을 파서 병사들이 마시고 밥해 먹게 한 흔적이 오늘날 까지 전해 온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활을 쏘는 훈련을 하기 위하여 만든 한산정이라는 궁터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좁은 협곡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과녁을 맞히게 하여 움직이는 배 위에서의 상황처럼 만들어놓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한산도에 가면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사전준비에 철저했던가를 알 수 있다.
다. 고하도에서의 전력 재정비
임진왜란 해전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싸움은 역시 명량해전이었다. 이순신 장군도 승리하고 나서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13척으로 133척의 적선을 물리쳤으니 난중일기에도 이것은 하늘이 내린 행운(此實天幸)이라고 적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도와 승리한 전투였다. 명량해전은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서해안을 경유하여 한강으로 진출하려는 적의 야심을 일거에 무너뜨린 쾌거였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은 가는 곳 마다 피난민들을 수습하면서 서해의 위도와 법성포까지 올라갔다가 1597년 12월 7일 영산강 하구에 있는 고하도로 옮겨 진을 친 후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 하였다.
고하도는 목포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조그만 섬으로 임진왜란 때는 보화도로 불렸다. 지형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섬이라 하여 용머리, 또는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하여 병풍도라고도 한다. 영산강 하구와 목포 앞바다에 연접되어 내륙과 서남해를 연결하고 있어 마치 영산강의 빗장처럼 보인다. 목포 유달산에서 남서쪽으로 바라보면 긴 뱀의 형상을 한 고하도를 볼 수 있다. 1598년 3월 23일 완도 고금진으로 옮겨 갈 때까지 이순신 장군은 이 섬에서 108일 동안 주둔했다. 진영이 있었던 곳은 속칭 끝당골이라 불리는 남쪽 산록에 위치한다. 당시 북쪽 봉우리에서 목재를 베어다가 진영과 군량창고를 지었고 인근의 군수와 현감, 그리고 주민들에 의해 조달된 군량미가 무려 486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은 위기의 순간에도 항상 준비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라. 고금진 시절의 준비상황
1598년 3월 23일 이순신 장군은 목포 고하도에서 진영을 완도 고금도로 옮겨 필사적인 노력으로 전력을 증강하면서 최후의 일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한 때 이순신 장군을 따라 몰려든 수많은 피난민들이 둔전을 경작했다는 고금도는 지금도 농지가 다른 섬에 비해 많은 편이다. 명량해전에서 제해권을 다시 찾은 이순신 장군은 고금도로 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였다. 장병들도 다시 모여들고 난민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 수만 가구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의 위용도 예전의 한산도 시절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단시간 내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하는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 덕분이었다. 고금도와 붙어 있는 묘당도 충무리에 가면 ‘묘당도 이충무공유적’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장군의 유해를 아산으로 이장해 갈 때까지 가묘를 만들어 봉안했던 ‘이충무공 가묘유허’가 있다. 덕동 수군기지가 있었던 고금진터에 가면 지금도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2. 원칙주의와 카리스마적 리더십
가. 원칙을 내세운 왕명 거절
이순신 장군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전투만 했다. 비록 상관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부하를 희생시키고 패배가 명백히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출전하지 않았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왜군은 다시 약 600여척의 배를 동원하여 그해 8월 초순까지 약 14만 명의 병력을 영남 해안에 결집시켰다. 당시 왜군의 첩자 요시라는 조선말을 유창하게 하는 이중간첩으로 조선 진영에 역정보를 흘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배를 타고 부산포로 올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면서 이순신이 나가서 막으라고 한다.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요시라가 퍼뜨린 허위 정보에 휘둘려 이를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고 권율은 다시 조정에 보고하여 이순신 장군에게 출동을 명하기에 이른다. 조정의 명령을 하달하기 위하여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을 방문한 권율 장군에게 이순신 장군은 단호하게 출전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일개 첩자의 말을 듣고 적정을 파악하지 않은 채 병력을 출동시키면 적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순신은 조정을 속이고 적을 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권율의 명을 받고 이순신 대신 부산 방면으로 출전한 원균이 넓은 바다의 풍랑 속에서 헤매다가 거제도 칠천량으로 겨우 후퇴한 후 적에게 거의 전멸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나서야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 탈영병 참수
1592년 5월 23일 부산포에 왜군이 당도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6월 5일과 6월 6일 두 차례에 걸쳐 선조는 이순신에게 경상도 해역으로의 출동명령을 하달한다. 이 때 일부 장수들이 경상도로 출동하는 것을 은근히 반대하고 병사들도 출전에 앞서 겁을 먹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출동하기 하루 전날인 6월 12일에는 황옥천이라는 병사가 탈영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순신 장군은 병사를 보내 황옥천을 집에서 잡아와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높이 매달았다. 탈영하면 이렇게 된다는 식으로 시범케이스를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하여 6월 13일 새벽에 여수항을 출발한 이순신 함대는 6월 16일에 옥포해전과 합포해전에서 승리하고 다음날 적진포에서 승리하면서 총 42척의 적선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제1차출전에서 아군은 약간 명의 부상자만 있었을 뿐 전사자는 한 명도 없는 일방적 승리를 거두었다. 출동에 앞서 탈영병을 공개처형한 것은 추상같은 군율을 세워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 정보는 힘이다
이순신 장군은 적의 이동이나 적선의 동태를 살피기 위하여 해안에 위치한 높은 산에 망군을 파견하여 운용했다. 대표적인 곳은 경남 고성군과 통영시의 경계에 있는 벽방산이다. 날씨가 맑은 날 벽방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거제도 북단과 마산시 구산면 반도 끝자락에 있는 증도(현재 실리도, 현지인들은 시리섬이라 함)와 안골포(현재 진해시 안골동) 앞바다를 지나 멀리 부산으로 나가는 길목이 훤히 보인다. 1594년 4월 22일에 한산도 수군 진영으로 급보가 날아들었다. 적선 31척이 이날 새벽에 거제도 북단에서 출발하여 21척은 고성 당항포로 들어갔고 7척은 오리량으로 3척은 저도(현재 마산시 구산면 돛섬)로 들어갔다는 내용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관측병이라고 할 수 있는 벽방산 망군 제한국이 보내온 정보를 바탕으로 어영담이 이끄는 경쾌선 선단이 출전하여 적선을 모두 불태우고 승리했으니 이것이 제2차당항포해전이다.
전남 해남의 달마산도 명량해전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망군을 보내어 적의 동태를 살폈던 산이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왜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수륙병진으로 서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1597년 9월13일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 중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9월 29일에 장흥 회령포(현재 장흥군 대덕면 회진리)에서 배설이 칠천량해전에서 갖고 도망친 배를 인수받고 다음날인 9월 30일 이진(현재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이동한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이 허약해진데다 토사곽란과 심한 몸살까지 앓아 병세가 심각한 지경이었다. 10월 3일 배에서 내려 몸조리를 한 다음 겨우 병세를 회복하고 10월 4일에는 진영을 어란포(현재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로 옮긴다. 이틀 후인 10월 6일에 이순신 장군은 달마산 일대로 내보낸 망군 임준영으로부터 결정적인 제보를 받는다. 왜군 선단이 이진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준비태세를 갖춘 이순신 장군은 10월 8일 아침에 어란포로 들이닥친 적선 8척을 격퇴하여 해남반도 끝에 있는 갈두까지 쫓아낼 수 있었다. 이것이 소위 어란포해전인데 명량해전 직전에 패잔병들로 구성된 조선수군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사건이었다. 명량해전 직전인 1597년 10월 16일 진도 벽파진에 진을 치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오전 일찍 탐망군 임중형으로부터 적선 55척 중 13척이 어란포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날 오후 적선 13척이 벽파진으로 접근하자 조선수군은 닻을 올리고 나가 이들을 격퇴시켰다. 그날 밤 다시 적의 야습이 있었으나 철저한 경계를 하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일진일퇴 끝에 적을 완전 격퇴하였다. 이 시기에 만약 이순신 장군이 달마산 일대로 내보낸 망군을 통하여 정보를 수집하지 않았더라면 낭패를 당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해전현장을 답사하다 보면 이 외에도 많은 망산을 볼수 있다. 한산도에서 제일 높은 산의 이름이 망산이고 통영에서 제승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있는 고동산도 망군이 관측을 하고 있다가 적선이 나타나면 제승당 수루를 향하여 고동을 불어 알렸던 곳이다.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여수시 시전동 뒷산인 망마산도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던 곳이었다.
피난민이나 민간인들로부터 수집하는 정보도 해전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산대첩이 있기 하루 전날이었던 1592년 8월 13일 이순신 함대는 현재의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인 당포에 정박하여 물과 장작 등을 보충하면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날 오후 늦게 당포 출신 목동 김천손이 나타나 이순신 장군에게 보고했다.
“적선 70여척이 오후 2시쯤 거제도 영등포(현재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에서 나타나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물고 있습니다.”
오후 2시경 견내량에서 적선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무더운 여름 날 목동 김천손은 당포까지 무려 20여 킬로미터를 달려와 이순신 장군에게 적의 동태를 알려주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날 이순신 함대는 주력을 한산도 인근에 숨겨놓고 판옥선 몇 척을 견내량으로 보내 싸움을 걸어 적을 넓은 바다로 끌어낸 후 아군의 장기인 포격전을 벌여 임란 3대첩 중의 하나인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1592년 7월 10일 당포해전에서 적선 21척을 불살라 무찌른 이순신 함대는 다음날 거제도 방면에서 나타난 적의 후속 선단을 찾아내기 위하여 개이도(핸재 통영시 산양읍 추도) 일대를 수색한 후 저녁에 고둔포(현재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 앞바다로 이동했다. 여기서 강탁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도망간 적선 20여 척이 거제도 방면으로 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다음날 저녁에는 현재의 통영대교 근처인 판데목으로 진출하여 거제도민 김모金毛 등으로부터 도망간 적은 견내량을 지나 당항포(현재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로 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7월 13일에 당항포 입구에 당도했을 때 유숭인 휘하의 함안 육군으로부터 당항포는 포구가 좁지만 전선의 출입이 가능하고 포구 안은 넓어 해전이 가능함을 알아냈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적선 26척을 불사르거나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당항포해전이다.
4. 부하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명량해전이 있기 전에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해상의 날씨는 점차 거칠어지고 추위가 엄습해 오고 있었지만 병사들이 입을 옷이 변변치 못하자 이순신 장군은 몹시 가슴 아파 했다. 벽파진해전을 치른 이틀 후인 1597년 10월 18일은 음력 중양절이었다. 당시 제주도에 사는 어부 점세가 가지고 온 소 5마리를 잡아 춥고 배고픈 병사들을 먼저 챙겨 먹이는 장군의 모습은 눈물겨울 정도다. 전투가 끝나면 임금에게 올렸던 보고서인 장계에서 전사한 병사들과 부상한 병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상을 내릴 것을 주청하였고, 최대의 격전이라고 할 수 있는 부산포해전에서 아끼던 부하였던 정운 장군이 전사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장군의 모습에서 부하를 사랑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적인 리더십이 있었기에 병사들은 이순신 장군 아래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싸웠을 것이다. 장부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도 바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순신 장군은 백성을 가슴으로 사랑했다. 백의종군하면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을 받고는 경상도에서 전라도 방향으로 가다가 한 무리의 피난민 행열을 만나자 장군은 말에서 내려 일일이 이들의 손을 잡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1592년 7월 13일 당항포 앞바다는 포성으로 뒤덮이고 불바다로 변하면서 적선 26척 중 25척이 이순신 함대에 박살이 났다. 많은 적들이 수장되었지만 일부는 허우적대며 육지로 상륙하였다. 여기서 이순신 장군은 적선 한 척은 온전히 남겨두라고 지시한다. 궁한 적이 육지로 올라가면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고 죽일 것이 예상되므로 이들이 타고 나와 도망갈 수 있게 배 한 척을 남겨두게 한 것이다. 예상대로 다음날 아침 100여명의 적이 그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당항포 입구의 당목(현재 고성군 동해면 동진교 아래) 근처에서 매복해 있던 조선수군에게 궤멸되고 말았다. 1593년 4월 7일에는 웅포(현재 진해시 웅천동)에 있는 왜군의 소굴을 공격하면서 억류되어 있던 사천 출신 조선 여인을 구출했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은 백성을 사랑하는 남다른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피난민들과 자원병, 의병이 모여들었다. 의능, 삼혜, 옥형대사, 자운선사 등 수도하는 승려들도 이순신 휘하로 와서 참전하였고, 어부들도 작은 고기잡이배인 포작선을 동원하여 물과 땔나무 등 군수품을 싣고 바다의 의병이 되어 이순신 함대를 따라 나섰다. 명량해전 당시에는 노약자와 어린애들도 포작선을 타고 조선수군의 뒤에서 징과 북을 치며 응원을 하였고, 부녀자들도 해변에서 강강술래를 하며 조선수군을 도왔다. 이순신 장군이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였기에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5. 효율성을 중시하는 리더십
가. 목을 지킴
남해의 해전현장을 답사하다가 지명에 ‘량’ 혹은 ‘목’이 붙은 곳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버티고 서서 왜군을 막은 곳으로 보면 된다. 견내량은 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 사이의 거제대교 아래에 있는 좁은 수로다. 부산포나 웅포 방면에서 거제도 북단의 괭이바다를 지나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관문이다. 전라좌수영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을 굳게 지켰다. 아직도 현지인들은 이곳 견내량을 ‘갯내’라고 한다. 바다에서 냇물처럼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통영시에 있는 통영대교 아래의 좁은 수로는 판데목이다. 땅을 파낸 좁은 목이라는 뜻으로 한문으로 착량鑿梁이라고 하는데 난중일기에 몇 차례 등장하는 지명이다. 여기도 이순신 장군이 당항포해전 직전에 하룻밤 정박하면서 적정을 살폈던 곳이다. 잘 알려진 명량은 울돌목이라고 하는데 물의 흐름이 워낙 빨라 물이 울면서 돌아간다고 하여 울돌목이라고도 한다. 해남군 문내면과 진도군 사이의 좁은 수로에서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을 이루어냈다. 최후의 일전을 펼치다 장군이 전사한 노량은 경남 하동군과 남해도 사이의 협소한 해협으로 조선과 명나라 연합함대가 버티고 서서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곳이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는 곳이 목이다. 명량해전이 있기 전에 이순신 장군은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명의 병사로도 길목을 지킨다면 천 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곧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이 명량에서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시 군율에 따라 엄벌할 것이니 비록 작은 일일망정 추호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나. 포격전 위주의 전술
왜군의 주력선은 아다케安宅船였고 주력무기는 조총과 칼이었다. 해전이 벌어지면 왜군의 장기는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었다. 즉 조총으로 접근전을 펼치다가 그물이나 사다리를 타고 우리 배에 올라와 칼싸움으로 승부를 거는 방식이었다. 반면 조선 수군은 사거리가 상대적으로 긴 함포인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을 동원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포격전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었다. 특히 천자총통에 장착하는 단발 화살인 대장군전은 단 한 발만 명중시켜도 150명 이상이 탑승하는 적의 주력선을 단숨에 격침시킬 정도로 위력이 있었다. 적의 등선육박전이 노동집약적이라 한다면 아군의 장기인 포격전은 기술집약적이라 할 수 있다. 한산대첩에서 사용한 학익진 전술은 일렬로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하여 학의 날개처럼 좌우로 진을 펼쳐 맨 앞쪽의 적선부터 집중포화를 퍼부어 차례로 격침시키는 전술이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은 선택과 집중을 통한 효율을 중시했다.
6. 문무를 겸비한 휴머니즘적 리더십
개전 초기에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서울과 평양을 함락시켰고 임금이 의주로 피난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이순신 장군은 진중에서 비장한 각오를 했다.
“내가 바다를 향하여 서약하니 고기와 용들이 감동하고 산을 향하여 맹세하니 초목도 알아보는구나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진중음이라는 이 한 구절의 시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장군은 무과에 합격한 사람이지만 이미 성리학이나 주역 등에도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였으며 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정돈된 인격자’였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동양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바다와 산과 고기와 용이 자신과 하나 되어 교통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 또는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도 엿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무인의 경지를 넘어 이미 도인의 경지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이라는 시에서도 역시 높은 문학적 자질과 선비의 경지가 보인다.
“수국추광모 水國秋光暮 바다에 가을빛 저무니
경한안진고 驚寒雁陣高 추위에 놀란 기러기떼 높이 나는구나
우심전전야 憂心轉輾夜 걱정에 잠못이뤄 뒤척이는 밤
잔월조궁도 殘月照弓刀 기우는 달이 활과 칼을 비추네“
전장에 나서면 서릿발 같이 엄한 이순신 장군이지만 평상시 그의 내면에는 인간적 연민과 여린 마음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과 자식에 대한 사랑은 난중일기 곳곳에 절절한 감동으로 묻어난다. 전라좌수영에서 가까운 송현 마을에 어머님을 모셔놓고 전란의 와중에서도 어머님을 돌보았다는 기록은 오늘날 까지도 부모를 가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백의종군 당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픈 몸을 이끌고 달려가 장사지내며 슬픔을 이기지 못한 것이나, 진중에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신이 먼저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한 그 마음은 평범한 아버지의 마음 그 자체였다.
배를 타고 한산도 제승당으로 들어가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등성이가 매왜치埋倭峙다. 왜군을 묻은 능선이라는 뜻이다. 한산대첩에서 수천 명의 왜군이 수장되고 그 시체가 바다에 떠다니자 이순신 장군은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내고 산에 묻어주었다. 비록 적군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 때문에 동원되어 이국에서 불귀의 객이 된 가련한 영혼들을 달래준 현장이 바로 이곳 매왜치다. 이처럼 학문과 덕을 겸비한 사람이 더불어 갖추고 있는 인간적 휴머니즘은 때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리더십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7. 과학적 리더십
가. 탁월한 전선 건조 기술
조선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은 왜군의 주력선인 아다케安宅船 보다 뛰어난 배였다. 밑바닥이 평평하게 생겨 평저선이라고도 하는데 수심이 얕은 우리나라의 남해안에서 싸울 때 포구 깊숙이 들락거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전투 중 썰물이 되어 갯벌에 좌초되어도 넘어지지 않고 밀물 때까지 기다리면서 성채처럼 버틸 수 있었다. 상장 갑판에서 포수들이 2개 조로 나누어 함포를 발사하고 장전할 때 좌현과 우현을 번갈아 180도로 신속하게 회전할 수 있었다. 배를 건조하는 재질도 조선에서 나는 홍송을 사용하여 삼나무를 사용한 일본 배보다 튼튼했고 특히 철제 못을 사용한 일본 배에 비해 나무못을 사용하고 대부분 짜맞추는 기법으로 건조했기에 배 위에서 함포를 발사해도 진동에 견딜 수 있었다. 일본 배는 갑판에서 대포를 발사하면 진동에 깨질 정도로 약했으며 소형포 1문 정도를 줄에 매달아 이물에서 발포하는 수준이었다.
판옥선은 전투를 할 때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분리하여 배치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상층 갑판에는 함포를 쏘는 포수와 화포장 그리고 활을 쏘는 사부를 배치하고 아래층에는 노를 젓는 격군과 닻을 전담하는 정수, 배에 스미는 물을 퍼내는 무상, 돛을 조정하는 요수 등 비전투원을 배치했다. 판옥선에다 덮개를 씌우고 선체를 튼튼한 박달나무 등으로 보강한 후 얇은 철판을 입혀 그 위에 칼이나 송곳을 꽂은 배가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주력 전투함이 아닌 돌격선으로 이순신 장군이 군관 나대용을 시켜 독창적으로 개발한 배다. 이처럼 전투함선이 과학적으로 설계되고 건조되었으므로 조선 수군은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조선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도 이 같은 우리조상들의 지혜가 면면히 이어져 온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나. 무기체계의 우수성
조선 수군이 운용한 가장 큰 함포가 천자총통이다. 천자총통은 태종 때 처음으로 발명되어 사용된 이래 더욱 개발되어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전선에 탑재하여 왜선에 큰 타격을 주었다. 포구에 장착하여 발사하는 대형 단발 화살인 대장군전은 길이가 2미터가 넘고 직경이 약 15센티에 달한다. 1998년에 육군사관학교에서 실시한 실험에서 대장군전은 400미터를 날아가 화강암 석축을 50센티나 뚫고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단 한발로 왜군의 주력선 아다케를 격침시킬 수 있는 위력이다. 경우에 따라 둥근 구형의 탄환을 넣어 쏠 수도 있는데 대형 탄환인 대연자 1발과 중형 탄환인 중연자 100발을 동시에 쏠 수도 있다. 지자총통의 위력도 대단하다. 구경이 약 10센티미터 정도인 지자총통은 장군전 한 발을 쏠 수 있고 때로는 대연자 한발과 중연자 60발을 섞어서 쏠 수도 있다. 새알처럼 생긴 조란환을 약 200발 정도 발사하면 요즘의 크레모아와 비슷한 위력을 발휘한다. 현자총통과 황자총통도 나름대로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는 무기였다. 활의 위력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편전을 쏘면 적의 갑옷도 뚫고 들어갈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탄통을 달고서 자체 추진력을 갖춘 신기전은 통신용 신호탄으로 사용되었고, 불화살은 노량해전 개전 초기에 겨울 북서풍을 이용한 화공작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여기에 비해 왜수군은 기껏해야 1문의 소형포를 줄에 매달아 쏠 수 있는 정도였다. 진동에 약한 선박 구조 때문에 함포를 장착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효사거리가 50미터 정도인 조총이 주력 무기였던 왜 수군에 비하면 조선수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무기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다. 천문과 지리를 이용
바다의 상황은 바람과 물때에 의해 좌우된다. 음력으로 보름과 그믐이 교차함에 따라 사리와 조금이 반복되고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조류와 파도의 상황이 바뀐다. 조류를 잘 타면 노 젓는 병사인 격군이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이동할 수 있고 바람을 잘 타면 돛을 사용하여 빨리 항진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 자신도 천문과 지리에 조예가 깊었지만 이 방면에 가장 능통했던 사람은 조방장 어영담이었다. 여수에서 제1차출전을 감행하던 날에도 이순신은 바다의 상황과 물길을 제일 잘 아는 어영담을 앞장서게 했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제승당과 같은 천혜의 양항을 수군기지로 선택하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 적을 치러 가다가 하룻밤 정박하고 가면서도 은폐가 가능한 깊숙한 만이나 섬과 섬 사이의 은밀한 장소를 택했다. 제1차출전 당시 거제도 옥포를 치러 가면서 정박하고 갔던 소비포(현재 경남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와 송미포(현재 거제시 남부면 다대리)는 은밀한 만에 자리잡고 있다. 웅포해전 당시 모항으로 사용했던 송진포(현재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도 그런 곳이다. 당항포해전이 있기 전날 정박하고 간 착포량(현재 통영시 미수동)은 통영과 미륵도 사이의 협소한 곳에 위치한 은밀한 곳이며, 장문포왜성(현재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군항포)을 공격할 당시 모항으로 사용한 온천량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은밀한 포구다. 당포해전 하루 전날 적정을 살피며 하룻밤 정박하고 간 곳은 사량도 상도와 하도 사이의 은밀한 장소인 금평이었다. 그리고 포격전을 위주로 하는 조선수군이 왜군의 주력함대와 정면승부를 건 곳은 좁은 해협이나 만이 아닌 한산도와 미륵도 사이의 넓은 바다였다. 견내량과 같이 좁은 수로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지면 적과 아군이 뒤엉켜 혼전이 벌어지고 결국 적의 등선육박전술에 휘말릴 것을 이순신 장군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끌어낸 후 섬멸한 것이 한산대첩이었다. 해전현장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이 모두가 천문과 지리에 능통한 장군의 과학적 리더십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 불굴의 투지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에서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하기 위해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 모아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낙안군수 신호가 관할구역을 넘어 경상도 쪽으로 출전하는 것에 대해 꺼리며 꽁무니를 빼는 듯했으나 녹도 만호 정운과 군관 정희립은 적을 치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있느냐며 경상도로 가서 적의 예봉을 꺾으면 전라도도 보전될 것이란 주장을 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출전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이후 반대하는 자는 엄벌할 것이라고 했다. 철저한 준비를 하지만 한번 결정하면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이순신 특유의 뚝심과 저력이 보이는 대목이다.
난중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의 하나는 ‘몸이 아프다’는 것이다. 열이 난다거나 토사곽란을 만나 고생했다거나 식은땀이 나고 몸살을 앓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전쟁을 수행하는 장수로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기에 신경성 위염 같은 만성 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몸이 아팠던 결정적 이유는 사천해전에서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기간 상처가 아물지 않고 고름이 나오는 상황에서 힘든 전투를 계속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정유재란 때는 사형선고를 받고 고문을 받아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만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노량해전에서 장열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불굴의 투지와 정신력이 아니면 견디기 힘든 인간의 육체적 한계상황까지 갔던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이순신 장군이 남겼던 말들을 살펴보면 그분의 굽힐 줄 모르는 용기와 불굴의 투지를 엿볼 수 있다. 1592년 6월 16일 거제도 옥포 해안에서 노략질을 하고 있던 적을 공격하기 직전에 이순신 장군은 휘하 장졸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행동하라. (勿令妄動 靜重如山)”
1597년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몰락하고 원균이 전사하자 많은 사람들은 조선수군에 대해 희망을 버렸다. 선조도 수군을 해체하고 권율 장군 휘하로 가서 육전을 하라고 명령했지만 이순신 장군은 당당하게 말했다.
“아직도 신에게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
이렇게 선조를 설득하여 이순신 장군은 기적같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했다. 그날 울돌목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던 말도 생생하게 우리 곁에 다가온다.
“무릇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1598년 12월 15일 밤 12시경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남해도 노량에서 왜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직전 이순신 장군은 함상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은 채 향을 피웠다. 천지신명께 제를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짐승 같은 원수를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此獸若除 死卽無憾)”
그날 밤을 새워 싸우다가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관음포(현재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앞바다에서 적이 손 총탄에 맞아 전사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戰方急 愼勿言我死)”
최근에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갑옷을 벗고 싸우면서 자살한 것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펴는 논객들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을 차분히 살펴보거나 그의 내면세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황당한 주장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장열하게 전사하였을 뿐이다.
1597년 9월 13일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 중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구례, 곡성, 순천 등지를 거치며 겨우 120여 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장흥 회령포에 도착하였다. 이 때 장군은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 관내 장수들을 회령포로 불러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함께 죽기로 맹세한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어찌 한 번의 죽음을 두려워하랴. 이제 모두 충의에 죽어서 나라 지킨 영광을 얻자.”
이처럼 이순신 장군은 최악의 순간에도 불굴의 투혼을 가지고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9. 맺는 말
필자는 약 5년 동안 통영 앞바다에 있는 오곡도라는 작은 섬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이순신 장군이 싸운 해전현장을 200회 이상 답사했다. 경상좌수영이 있었던 부산에서부터 서쪽으로 진도, 해남 목포 까지 이순신 장군이 누볐던 수많은 해안포구와 섬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장군이 싸웠던 그 바다에 가면 아직도 그날의 포성이 들리고 격군들의 노젓는 소리와 승리의 함성이 들린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지명들은 요즘 지명과 같은 곳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곳이 많다. 그래서 필자는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전에 필사본으로 그린 정밀 지도인 동여도를 가지고 해전현장을 답사했다. 현장에는 아직도 그날의 역사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현지에서 구전으로 전해 오는 많은 이야기도 들었다. 서재에 앉아 먼지 묻은 옛날 기록만 들여다보아서는 알 수 없는 소중한 사실들을 현장답사를 통해 알아낸 것이 큰 보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장군이 승리한 현장이나 이순신함대가 하룻밤 정박하고 간 역사적인 장소에 가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제대로 된 안내 팻말 하나 없었던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때 텔레비전에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이순신신드롬에 가까운 사회적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지만 드라마가 끝나자 그 열정은 냄비처럼 식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현재 전국적으로 이순신 장군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행사와 기념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경상남도가 추진하는 남해안시대 프로젝트는 거북선 찾기와 백의종군로 복원사업을 포함하고 있다. 충무공 탄신기념일에는 아산에서 해마다 성대한 기념행사를 하고 여수에서는 제1차출전을 기리기 위해 진남제와 거북선축제를 개최한다. 통영에서는 한산대첩제를, 거제도에서는 옥포대첩기념제전을, 남해군은 노량해전승첩제를 열고 있다. 그리고 진도, 해남, 고성, 사천, 진해 등에서 경쟁적으로 기념사업과 문화행사를 한다.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상업주의의 폐해와 중구난방식 사업추진으로 자칫 장군의 위업이 훼손될까봐 염려스럽기도 하다.
영웅은 난세에 나온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이 혹시 난세는 아닐까? 미국발 경제위기로 어느 때 보다 어려운 이 때 이순신 장군과 같은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고대해 본다.
[출처] 해전현장에서 바라본 이순신 리더십|작성자 나홀로여행